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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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어릴 때는 백경으로 더 유명했었던 것 같다. 고래잡이 이야기. 지금도 어린이용 책으로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 아닐까.

완역본이라 했다. 역자는 이종인. 현대지성에서 같은 역자의 작업으로 만난 책이 걸리버 여행기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인가보다.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늘어지는 부분이 없어 잘 읽힌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종인 선생의 팬이 되었나보다.

 


모비 딕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다 위에서 커다란 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려서 접했던 이야기는 극히 일부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이 소설 모비 딕의 매력을 다 설명해주기는 어렵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역본을 접한 느낌은 어떤가. 소설은 에필로그 포함 거의 7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이다. 이 안에는 비단 고래 이야기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학이 그리고 그 안의 소설이라는 장르가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인종? 종교? 정치 혹은 종합적인 문화의 측면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포경선에 대한 당대 시각과 포경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까지. 아니다. 작가 멜빌은 내가 언급한 소수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담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소설 미비 딕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다양하고도 철학적 혹은 사변적이며(이 대목에서 사변적이란 표현이 적절한지 잠시 고민 중이다)때로는 핵심 주제에서 살짝 벗어나는 듯한 많은 이야기를 엮어가는 듯하다. 어떤 조밀한 관계의 구성 이 아닌, 조금씩 이야기를 확장해가는 이와 같은 형식은 조금은 색다른 소설 쓰기로 다가온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주제와 사건을 향해 인물들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중간과정에 대해 생각했었다. 멜빌은 이 중간과정에서 글 쓰기를 위해 자신이 준비한 모든 재료들을 쏟아붓는 듯하다(방대한 고래지식 포함) 이로 인해 얻은 긍정적인 이미지는 어쨌든 저자 멜빌의 작가로서의 서사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라고 감히 언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딴은, 성경 혹은 신화 등에서 응용해 소설 속에 녹여놓은 부분도 그렇고, 거대한 괴물로 표현되는 모비 딕이라는 흰고래와 인간의 죽음을 사이에 둔 사투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조금은 더 깊이감 있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추측이겠지만.

 


인간은 왜 고래를 사냥했던 것일까? (현실적인 이유는 책에서 어느정도 알 수 있기도 하다) 왜 신은 고래라는 괴물을 창조해냈을까? 인간은 극한의 어느 지점을 정복하려는 근거없는 패기에 사로잡히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고래는 그런 인간의 패기에 희생되는 존재이자,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도전 의식을 부추기는 대상이며 같이 경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혹은 차가운 바다에 죽어나가면서도 포경선에 올라타는 이유는, 비단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패기에서 기인하는 성취욕과 승부욕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슬며시 고개를 든다.


 

책에는 고래를 잡는 사람은 야만인이다,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식인종을 포함한 미개척지의 원주민들 그리고 기독교를 모르는 이들을 두고 야만인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들 야만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몸이 날래고 힘이 좋아 포경선에 꽤 중요한 요직에 설 수 있기는 했지만, 결국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야만인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보였다. 더욱이 작가는 고래를 잡는 백인 또한 야만인이다’, 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그저 그들이 개종되지 못한 까닭에 또는 잔인한 고래잡이의 특성 때문에 시종 야만이었다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는 식의 어떤 비판을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인간은 꼭 포경선을 타지 않더라도 그래서 거대한 고래와 마주서지 않더라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는 누구나 야만인의 탈을 쓰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용맹함은 무모함과 잔인함을 가리기 위한 좋은 가면이 될 수도 있으며, 대중으로의 감정적 호소는 개인의 사심을 숨기기 위한 도구로 변모하기 쉽기 때문이다.(에이해브 선장의 행동)

 


대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꼭 그만큼 잔인해지는가 싶다. 하얀 고래를 잡기 위해 가는 과정에서 바다에서의 경험하게 되는 자잘한 투쟁에서도 그려지고 있지만, 인간은 잔인하게 바다를 점령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심판이 그려지고 있다. 사람들이 모비 딕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심판이라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가보다.

 


두서없이 떠들다보니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정리가 필요하다. 고래가 나오는 소설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시각이 당연한 일인지 어색한 일인지 한 번에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각설하고 책 말미에 역자 이종인 님의 해제를 참고하면 좋겠다. 작품을 어떤 시각으로 읽어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지시해주는가 싶다. 물론 다양한 선택지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할지에 대한 요소는 개개인에게 달렸다.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을 책. 모비 딕. 대작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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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란 - 오정희 짦은 소설집
오정희 지음 / 시공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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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란

 


20229월 추석 연휴가 끝났다. 연휴 마지막 날 어제가 생일이었다. 이따금 추석 연휴와 생일이 오가며 겹쳐서 다가오곤 한다. 생일은 양력인데 추석을 음력으로 따지다보니 어느 해는 추석 당일이 생일인 경우도 있더라.

그렇긴한데, 언제나 생일보다는 명절이 더 중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딸이라는 자리보다는 며느리이고 아내이며 아이들의 엄마라는 자리가 더 컸기 때문이다.

 


시댁에 내려가기 이삼일 전부터 빠지던 몸무게는 내 집에 와 꼭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 원상태를 회복했다. 결혼한지 20년째. 여전히 예민하다. 몸무게가 빠지고, 지병이 나빠지고. 누가 알까.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아니,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뭘 그런 것까지.

 


오정희의 짧은 소설 활란을 읽는다. 참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작가다. 20대 시절 만났던 오정희와 40대 후반에 만나는 오정희의 글. 작가는 여전한데 자꾸만 의문이 생겨난다. 무엇이 변했을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결국 변해버린 건 나뿐인가.

이상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리기도 한 이 기분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건지 가만히 생각해야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내, 엄마, 며느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끌어안은 나. 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동일시 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어느새 나는 오정희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 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나는 작아진 내 모습을 발견한다. 때로는 구차하고 때로는 씁쓸하며, 어느 순간에는 울컥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착잡하고, 슬며시 늘어지는 자괴감과 작은 실소들이 이어진다.

 


제목 활란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김활란 박사처럼 여성으로서 당당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활란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결혼 혼수로 책상을 해왔다는 것까지. 그러나 주인공 활란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평범한? 중년의 시간을 살아간다. 스스로 빛을 내기보다는 남들이 내는 빛을 따라가기 바쁘고,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그런 여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만들어내고 사회가 끌어가는 이런 모습이 진정 평범한 모습인가에 대한 의문은 늘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작고 낡은 신혼집에 남들 다 해간다는 양문형 냉장고 대신 커다란 책상과 책장을 들여놓았던 청순했던 옛 시절이 오버랩된다. 제법 튼실하고 큰 책장이 들어간 자리 맞은편에 작은 냉장고가 자리를 잡았던 낡은 그 집은, 비가 사선으로 퍼붓는 날이면 벌어진 틈으로 벽까지 스며든 빗물로 인해 새로 바른 벽지가 불룩하게 부풀어오르곤 했었다. 좋은 냉장고 대신 책과 책장을 선택한 것에 대해, 친정집보다 한없이 소박한 신혼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해 그 시절 순수했던 신혼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이란 것이 존재했으니까. 회사에 출근한 그가 모르게 혼자 남겨진 나는 종종 박라연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며 위로했었다.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우리는----’

 


나는 공주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인의 이야기처럼 정말이지 그렇게 덤덤하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청승이다.

주어진 삶에 순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알을 깨고 나온다는 이야기처럼 알은 깨져야 하는 것인데, 어쩌자고 알 속에서 안주하며 살아가게 되는지. 그것이 삶인지 그것이 인생인지. 근 오십 년을 살아도 여직 잘 모르겠다.

 


어제 친정엄마가 문자를 보내셨다. 생일인데 잘 보내고 있니? 그때까지 명절 후 기름기 많은 음식 설거지로 인해 내내 서성거려야 했던 나는 투정 가득한 문자로 화답을 했었다.

-생일은 무슨. 여태 설거지만 했구만.

-인생이 다 그런거다.


 

일흔이 넘은 내 엄마는 이미 삶에 통달하셨나보다. 당신의 삶도, 당신이 낳은 딸의 삶까지도 말이다.

 


여러 편의 짧은 소설 중 방생상봉기가 아른아른 기억에 남을 듯싶다. 뭐랄까. 잔잔함이 좋은 건지도. 오정희의 글을 구태여 요즘 시끄러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은 내게 없다. 온전히 그냥 그녀의 글로 받아들이고 싶다. 2000년대 이후의 소설을 자주 접해 볼 일이 거의 없었기에 나는 여전히 그 시기 이전의 소설 세계에 머물러 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노라고 쓴다. 가만히 따뜻하게 차가워진 가슴을 쓸어주는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고 쓴다. 꽁꽁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여주는 작가의 그 마음을 다시 읽어볼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다고 쓴다. 안정감과 과하지 않은 무게감. 가볍지 않은 진중함. 더 깊은 것과 더 넓은 것.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것들까지 보여주려 애쓰는 작가 오정희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내게 나와 닮은 삶을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작은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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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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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작이다. 책은 미궁(迷宮)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어지러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움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건가.

책은 어쩐지 소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도입부분을 연상시킨다. 그러면서도 어떤 까닭인지 같은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오버랩이 되기도 한다.

 


거림감이라고 해야할까. 거리감은 객관적인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인 나는 묘하게 객관적 거리를 두면서도 사건에 개입하며 몰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니 본인이 스스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간다.

이방인의 주인공이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복잡한 자신의 감정을 접어둔 시선을 읽었다고 한다면, 인간실격의 요조는 존재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 역시 기억한다. 미궁 속 주인공 신견에게서 나는 왜 자꾸만 뫼르소와 요조를 찾게 되는 걸까.

 

 


내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를 생각한다. 부정하고 싶은 나. 외면하고 싶은 나. 나를 대신해주는 또 다른 나. 그러나 어느 순간 의지하고 싶어지는 나의 분신. 신견에게는 그런 존재인 R이 있었다. 마치 키메라의 저주처럼 R은 신견과 함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분리된다. 이 분리는 강압에 의한 분리에서 시작되었고 의지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외면하고 떠나보냈지만 기실은 보내지 않은 어떤 것? 역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은 밀실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의처증의 남편, 그런 남편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이들의 두 아이들. 아들과 딸. 사건은 당시 12살이었던 어린 딸을 제외한 다른 가족이 전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점. 묘하게 아내 주검 위를 덮었던 300개가 넘는 종이학에 시선이 멈춰서게 된다. 그리고 나 신견은 유일한 생존자인 당시 12살이었던 사나에와의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상처를 품은 사람들은 비슷한 상처를 앓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걸까. 슬픔에 힘겨웠던 사람이 타인의 감춰진 슬픔을 더 잘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다 우연한 기회로 상처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의 상처는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 걸까.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 혹은 상처를 감추고 살아간다.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않은가. 누구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런 건 조금 다른 걸까.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하는 어떤 일들에 대해 대리 만족. 혹은 대리 고통을 느낀다는 것. 그보다 더 나아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시작된 분노마저, 어느틈에 내 것으로 변해버리는 자괴감 같은 것들 말이다. 결국은 내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것들이지 않을까.

 


소설이 갖는 특징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장학하는 그 무엇이다. 긴장감이라고 해야할지. 작가만의 독특한 문장이라고 해야할지. 어떤 거대한 흐름이라고 해야할지. 건조하고 혹은 무료하며 반면에 날카롭고 쓰라리기까지 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소설이 갖는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만 같은 홀가분함을 느낀다. 이제, 미궁에서 벗어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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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가와카미 데쓰야 지음, 송지현 옮김 / 현익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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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가 보다. 작은 서점의 이야기들 말이다. 누구나 한번은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본 적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허리 정도 높이의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 사이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유영하던 그런 순간들을 추억처럼 간직하고 있지는 않을까.

작은 서점에서 책을 살 때면 책방 아저씨가 늘 손수 책 포장을 해주시곤 했었다. 그리고 책갈피도 잊지 않고 한 개씩 꼭 꽂아주곤 하셨지.

그 시절에 생각하기로는 책방 주인을 하려거든 책 포장도 반듯반듯 잘 해야 될 것만 같았다. 한 시절 작은 책방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아쉬웠다. 지나간 시간이 그리웠던가.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마치 신성한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작은 책방들이 특색을 갖고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사는 소도시에 작은 책방은 진정한 책방의 기능을 잃은지 오래다. 학생들의 수험책 관련 책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문을 하면 구매할 수는 있는 모양이다.


 

고바야시 서점에 대한 소설은 뭐랄까 잊고 있던 것들을 소급하고, 느끼며, 또 그렇게 되새기는 시간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래된 것들... 아니다,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들을 상기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주인공 오모리 리카는 대형 출판유통회사 다이한에서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다른 동기들과 떨어져 멀리 연고지가 없는 지역 오사카의 지점으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그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형식의 책이다.


 

소설의 구성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선 오모리의 서사와 그녀의 스토리가 첫 번째이고, 그녀가 알게 된 작고 오래된 동네 서점인 고바야시 서점의 주인인 유미코씨가 오모리에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형식을 갖춘 것이 두번째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리카는 자주 고바야시 서점의 유미코씨에게 상담을 하면서 도움을 얻게 된다. 그 도움이란 서점을 운영하면서 삶의 지혜와 연륜을 고루 갖춘 유미코씨의 이야기에서 점철되어 흘러간다.


 

전반적으로 무난한 스토리가 이어지는 과정에 출판사와 서점 홍보와 관련된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에피소드가 시선을 끈다. 소설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백인문고라든지 책 미팅과 같은 이벤트는 실제로 시행되었던 적이 있음을 작가 가와카미 데쓰야가 책 말미에서 설명하고 있다. 좋은 아이디어가 책 문화와 더불어 책을 읽는 이들에게까지 긍정의 힘으로 다가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 속에 잠시 등장하는 출판유통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잠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삶의 고비고비마다 진정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을까? 라는 의문. 그것이 책이어도 좋겠고 또 그 대상이 화려하지 않아도 겸손하여 때마다 고개 숙일 줄 아는 내 곁에 누군가이면 더없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소박한 욕심인가.


 

그런저런 욕심으로 책 속에서 더 침잠하는 깊이감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고바야시 서점 이야기는 꼭 이만큼의 깊이와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겁지 않은 무게감으로 잔잔하게 곁을 내어주는 책이다. 이런 류의 책들이 많이 발간되는 까닭은 어인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여전히 힐링의 매개체가 아닌가.

 


바람이 서늘해진다. 책 보기에 좋은 날씨라는 뻔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그저 하늘이 이쁘다는 감탄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냥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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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뮤지컬 《순신》, 영화 《한산》 《명량》 《노량》의 감동을 『난중일기』와 함께
이순신 지음,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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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이순신의 일기다. 그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영웅이니까.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졸업한 초등학교에도 이순신과 거북선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세종로 광장이든 이웃의 학교든 공원이든 역사적 유적지든 자리를 가리지 않을만큼 그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그런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필독서와 같은 개념의 난중일기를 이제서야 읽는다. 난중일기를 읽을 생각에 앞서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기를 원했다는 고백을 하고 싶어진다. 언제나 강한 이미지, 영웅의 이미지가 아닌 갈등하고 고뇌하고 흔들리는 보통의 인간적인 모습을 찾고 싶었다고 한다면 이상한 일이 되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일이었을까.

 


기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임진년(1592) 정월 초 1(임술)부터 시작해 전사하기 전 무술년(1598) 1117일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물에 대한 이야기로 책에는 나오지는 않지만 한자로 쓰여진 초고본과 정자편집으로 정조 때 쓰여진 이충무공전서 등과 관련한 내용은 참고로 읽어보면 좋겠다.

책은 옮긴이 장윤철에 의해 이순신의 친필 초고본을 대본으로 하고 초고본에 없는 부분은 이충무공전서의 일기로 보충했다는 내용을 알리고 있다.(p418 참고)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난중일기 안에서 이순신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다시 찾아가곤 했다. 무엇보다 일기의 기록으로 보이는 그의 이미지는 강하면서도 유연함을 공유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늘 군비를 정비하고 훈련을 유지함으로 나태함에 빠지지 않게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시켰던 인물이다. 군사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엄한 체벌과 동시에 인간적인 군장의 모습을 보인다. 군법을 어겼을 경우 가차 없는 형벌등(사형 내지는 곤장)을 시행했기도 했지만, 반면에 측은지심에서 우러나는 인간적인 면모도 자주 언급되곤 한다. 배불리 먹일 수 있게 고기와 술을 풀어주기도 하고, 부하에게 옷을 친히 내려주거나, 여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등 세심한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일기에서는 전쟁의 관련한 내용보다는 사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누가 찾아오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들. 아들과 조카와 무엇보다 자주 언급되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고령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여느 평범한 아들의 모습이라고 할까. 또한 아내의 이야기도 두어 번 등장하는데 어머니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내용이기는 하지만 아내를 걱정하는 지아비의 모습도 눈에 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활을 쏘고 (체력과 혹은 인간관계까지 고려한 여러 의미의) 훈련을 지속해왔으나, 그는 자주 육체적으로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이 몹시 좋지 않다’, 라는 식의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늘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았나싶기도 하다. 늘 땀을 흘렸으며 배앓이로 인해 또 많은 생각들로 인해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보면 지나치게 완벽하고자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비난과 비판을 감추지 않았다. 일기 안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가소롭다,라는 표현은, 일기에 기록으로 남은 다른 표현으로 한탄스럽다, 라든지 한스럽다와 같은 표현보다 상대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반감은 일기 곳곳에서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날그날 날씨의 기록들. 바람의 방향과 강도. 업무와 관련한 일처리 상황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요소들. 불안한 마음을 점괘로 풀어보고자 하는 마음들. 꿈에 의지하려는 모습들. 원망보다는 자신이 처한 자리에 대한 책임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순간순간들.

 


그의 일기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아마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전쟁이 아니었어도 그는 일생동안 책임감과 중압감을 지고 번민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뒤바뀌고 환란이 닥쳐와도, 혼자만이라도 올곧게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순신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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