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영감은 어떻게 보면 재능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런 천재적인 면을 빼고, 보통의 사람이 일상에서 얻는 영감이나 작업의 전환점은 결국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는 것 같다.  설사 작업이 용이하지 않아 선뜻 시작할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무조건 일단은 일을 펼쳐놓고 오롯히 그 일에 시간과 노력을 부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어떤 특이점 같은 부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시점에서는 잠깐씩이지만 무아지경에 빠져 손과 머리, 그리고 눈이 마법처럼 각각의 역할을 한다.  직업의 특성상 상담과 리서치 외에는 문서작업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일정한 형식과 구성 및 필요한 내용을 토대로 한다는 점 외에는 무청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면서 느끼는 점이다.  까다롭고 어려운 케이스이면서 고객의 이해가 부족해서 그간 준비과정이 너무 길어진 일을 월요일에 첫 시작을 하는 것으로 오늘까지 거의 원하는 수준과 양의 작업을 마무리한 끝에 조금씩 감을 찾아가고 있다.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지금, 어쩌면 원치않는 한가함을 이렇게 밀린 업무를 빨리 처리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마중물을 붓겠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계속 미뤄온 여러 가지 개량작업과 다른 마케팅을 위한 준비로 연결될 수도 있겠다.  이래저래 최근 일에서는 크게 반가운 일이 없었는데, 아주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책을 읽으려고 짐을 챙겨서 나왔는데, 소설보다는 논픽션이 땡겼기에 최근에 들어온 유시민작가의 책을 들고 왔다.  문제는 밑줄 그어가며 읽을 책을 갖고 오면서 자를 두고 왔다는 것.  책이 좋아서 잠깐 고민했지만 과감하게 자와 펜을 갖춰 제대로 읽기로 했다.  


이 글이 포스팅될 즈음에는 아마 목요일이나 금요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이 적어서 정리할 마음이 들지 않고, 특히 '한눈팔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좀저럼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느낀 것들과 비슷한 것들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는데, 벽창호 같아 보이는, 일견 소세키의 아바타라고도 할 수 있는 주인공의 모습과 주변인물들을 보면서 떠오른 것들을 여과 없이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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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서 일요일인 오늘에 와서 다시 이어쓰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땐 상담을 겸한 미팅이 저녁식사로, 그리고 술자리로 이어지는 바람에 대취하고 토요일까지 모두 쉬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꾸준한 운동이 정말 좋은 것이, 상대는 58세인데 일년에 두 번씩 full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정정하더라. 그 연배의 한국아저씨들 중에서는 상당히 건강한 듯. 술도 하고 담배도 하는데 매일 5마일씩 뛰고 주말엔 10마일, 거기에 조기축구까지...덕분에 난 오늘 겨우 gym에 복귀해서 weight를 좀 세게 돌리고, 내일은 가벼운 weight에 cardio를 full로 돌리기로 했다.


소세키의 자전소설. 몇 가지 디테일을 빼고는 거의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주석과 역자후기를 읽고 알게 됐다. 사실대로라면 소세키도 참 지난한 삶을 살았던 듯.  이 나이를 먹고, 이 만큼 겨우 겨우 공부해서 살아보니 딱 이 시절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 그대로 맘에 들어온다. 주변에서는 그리 공부를 했으니 귀하게 쓰일 것이라는 둥, 앞으로 출세할 것이라는 둥, 사정도 좋겠다는 둥 기대와 질시가 가득한데 막상 그 자리에서 보면 자기 위로도 잘 나가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별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 머리는 턱없이 굵어져서 멀리 높은 곳을 바라보는 듯한 관점으로 세상사를 대하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에서 이리 저리 치이면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거기에 결혼생활도 그저 그렇고, 부부사이도 그냥 그래서 대단한 것도 없고 깊은 속을 나눌 사람이 없는 고통은 덤이다. 누구 탓이라기 보다는 이 부부의 경우 늘 접점을 찾지 못하고 모처럼 좀 깊은 이야기를 나눌 참이면 뭔가 다른 이유로 틀어져버리는 것이 반복되면서 서로 '니가 그렇지'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게 된다.  여기에 싫은 소리를 못하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돈을 뜯기기도 하는 등, 보고 있으면 무척 갑갑한 주인공의 삶인데, 내 삶도 별반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어쩌면 그리도 딱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의 70%정도가 그대로 겹치는 것인지.  갑자기 소세키를 더 들여다 볼 생각에 '그 후'를 읽다가 한 세 번째 읽는 탓인지, 내용이 지지부진하고 결론을 다 알아버리고 나니 더 볼 생각도 들지 않아서 도로 꽂아버리고 말았다.  '문학'이라는 거창한 말로 '소설'과 '소설나부랭이'에서 애써 거리를 두고 차별하려고 하지만, 결국 모든 창작물은 소설이고,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남으면 '문학'도 되고' 고전'도 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어인 일인지 이 책을 읽고 얻어졌다.  책은 일단 재밌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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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월요일...


'녹스머신'과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두 권 모두 단편모음집이고 대체로 평이한 수준의 재미는 있다. '녹스머신'의 경우 추리소설이라는 자재를 갖고 SF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 특이한데, 추리소설의 법칙을 수리학적으로 분석하여 일종의 양자역학 같은 걸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꽤 재미있었고 '흑거미 클럽'의 오마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탐정 주변인물들의 모임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려는 에거서 크리스티를 제거하려고 모의하는 이야기 또한 괜찮았다.  '...모험'에서는 특별한 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깊고 긴 이야기를 기대했다만 청소년이나 대학생 정도의 독자에게 눈을 맞춰 쓴 것 같다. 좀 예전에 쓴 책이 다시 나온 것 같은데, 약간 그 시절까지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민족사관 - 소위 환단고기논란으로 극단적인 대립이 생기기 전 - 의 영향이 조금씩 보인다. 유시민작가의 책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건 그의 분석과 주장인데, 이때나 지금이나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주는 그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왜 우리는 국어와 영어와 수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나머지는 되는 대로 가르치는 교육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최소한 국어와 국사, 그리고 수학과 과학 이렇게 두 부분을 기초로 잡고 여기에 영어를 비롯한 제2외국어에 치중토록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리고 국사교육도 그런 것이 매 학년 혹은 과정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부분으로 시작해서 학년/과정이 올라가면서 심화되는 방향으로 가야 맞지 않을까? 맨날 같은 걸 조금 더 디테일하고 조금 더 길게 배우다 말다를 반복하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국사,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인가 두 번 밖에 수업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확실히 독재자들은 시민들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는 것을 막고 체제순응적인 세뇌에 열을 기울여왔다는 생각이 든다.


Memorial Day 연휴인데 잠깐 회사에 나와서 잡무를 처리하고 gym으로 갈 예정.  그 전에 어쩌면 서점에 들릴 생각도 하고 있다.  어제 산타클라라 시립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소설들을 빌려온 덕분에 몇 권을 후딱 읽어버렸는데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꽤 있어 몇 번 더 다녀갈 것 같다. 이곳이나 본국이나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듯, 점점 더 한국어로 된 책은 숫자가 줄어들고 업데이트도 잘 안되는 것 같다.  하기사, 부모들이 책을 안 읽으니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고, 읽어도 영어책을 읽을테니 이미 한국어책은 그저 구색맞추기라고 봐야한다.  


오늘 읽은 책들까지 해서 주중에 다시 한번 정리할 생각이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쉬지 못하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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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5-2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님... 책에 밑줄 그을 때 자대고 그으세요?

transient-guest 2018-05-29 12:34   좋아요 0 | URL
네 주로 그렇게 합니다. 소설은 주로 안 그러지만 논픽션, 고전에서 맘에 드는 문장에 자와 펜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거의 20년 정도 된 제 버릇이랍니다.
 
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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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의 단편으로 나눠서 한다. 아무리 히가시노 Monthly라지만 이렇게 해서 책이 나오는 건 말도 안된다는 생각. 소위 본격추리의 전형에 대한 풍자적인 비판이라는 건데 단편 이야기 하나면 충분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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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탐정 이상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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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경성탐정록‘이 아마추어에 의한 오마쥬였다면 이 책은 전문작가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민비에 대한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고 장치로써의 역할도 별로였지만 아이디어는 기발했다고 볼 수 있다. 2, 3권이 궁금해지는 책. 늘 이 시절에 대한 이상한 향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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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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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가벼운 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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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거꾸로 읽는 책 25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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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조금 더 깊은 내용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약간 청소년이나 대학생까지를 대상으로 쓴 글의 느낌. 그래도 유시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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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hsuvin 2019-07-13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1994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읽고 그후로도 계속 좋아하는 책이예요^^ 주변의 청소년에게 권해주세요~^^

transient-guest 2019-07-15 12:48   좋아요 0 | URL
주변에 한글과 책을 읽는 청소년이 있우면 그리 하겠습니다만 책은 이젠 거의 저만 읽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