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진리를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대형교회는 더 이상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
신약의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지만, 그 운영 방식은 구약의 권위주의적 체계를 답습하고 있고, 심지어는 구약 말씀을 맥락 없이 끌어다 쓰며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목회자 세습은 가문 중심의 종교 권력을 공고히 하며, 비판은 곧 사탄의 공격으로 간주되고, 신도들에게는 “교회는 항상 핍박받는다”는 내러티브로 책임 없는 순종만이 요구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26)
그 결과,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회개의 공동체도, 섬김의 자리도 아니다.
그곳은 예수의 이름을 앞세운 체제이며, 권력에 안수기도를 해주던 과거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전두환에게 안수기도를 하고 광주의 피에 침묵하던 교회는, 지금도 다른 이름의 권력에 기대며 침묵하거나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타락했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허울 아래, 진정한 성찰과 정의의 외침을 가로막는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27)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영적 맹인을 세워 그들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태복음 15:14)
더 무서운 건, 그 맹인을 따라가는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가로막는 교회를 떠난다.
믿음에 냉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진심이기 때문에 위선과 정치적 구조를 감당할 수 없어서 조용히 등을 돌린다.
예수는 여전히 진실하지만, 교회는 그 진실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이제 묻고 싶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그 길 끝에, 정말 예수가 계신가?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교회는 또 다른 무기를 꺼내 든다.
그것은 ‘죄의식’이라는 이름의 사슬이다.
회개하라고 외치며, 사람들의 연약함을 죄로 단정하고, 실수와 감정, 삶의 흔들림을 신앙 부족으로 몰아간다.
그러면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너는 부족하다”, “믿음이 약하다”,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말을 반복한다.
신도는 용서를 구하는 존재이기를 강요받고, 의심하거나 상처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이 죄의식은 죄를 씻어주는 복음이 아니라, 죄를 이용해 통제하는 체제의 도구로 변질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이 구조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게 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만든다.
종교가 삶을 회복시키는 힘이 아니라, 영혼을 억누르는 무기로 쓰일 때,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정신적 감옥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지만,
지금 교회는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죄의식에 가두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오늘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1980년대에 이미 '서울 예수'라는 책은,
모 목사와 당시 종말주의복음으로 급성장하던 그의 교회를 대입하여 한국 교회의 성장 이면에 감춰진 권력 지향적 구조, 재정 불투명성, 맹신과 체제 충성의 신앙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 책에 나오는 풍경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오히려 더 정교해졌고, 더 당당해졌고, 더 복음처럼 포장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체제의 정점에 선 이들은 오늘날 억대 연봉을 받고,
교회 재정으로 고급 차량, 운전기사, 비서, 가족의 유학과 해외 체류,
심지어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까지도 손에 넣는 이중 구조의 삶을 당연한 듯 누리고 있다.
예수의 이름을 들고 설교단에 서지만, 그 삶은 어느 기업 CEO보다 더 안정되고 더 세속적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8)
예수는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가진 것을 세습하고,
고난은 설교하되 자신은 고난 없는 특권을 누리며,
자녀에게는 십자가가 아니라 미국 시민권을 물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구조에 이의를 제기할 때,
그들은 성경을 들어 비판을 막는다.
“주의 종을 손대지 말라.” (시편 105:15)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름이라.” (로마서 13:1–2)
이런 구절들은 원래 선한 리더십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그들은 이 말씀을 이용해 비판을 억압하고, 권위에 절대 복종하라는 도구로 왜곡한다.
“너희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패하는도다.” (마가복음 7:13)
그 순간, 성경은 진리의 검이 아니라 권력의 방패가 된다.
그리고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 아니라,
비판 없는 충성과 침묵의 공간,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플랫폼이 되어버린다.
그 오용은 이제 목사 개인을 넘어서,
정치적 독재자까지 하나님의 권세로 덧칠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일부 목회자들이 **헌법적 질서를 훼손한 권력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 “기름부음 받은 자”**라 부르며
그들을 향한 비판을 신앙적 대적 행위로 몰아가는 현실을 목격했다.
독재적 통치, 언론 탄압, 법치 파괴조차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되고,
“그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공공연히 설교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그리고 그는 결코 권력자에게 무릎 꿇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는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느냐?” (요한복음 5:44)
예수는 여전히 진실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 진실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묻는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그 길 끝에,
정말 예수가 계신가?
교회가 죄를 덮는 장소가 되어선 안 되며,
회개 없이 용서받는 흉내를 연출하는 가짜 신앙의 무대가 되어선 더더욱 안 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바로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 전 검사장이 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고,
회개는커녕 오히려 피해자인 서 검사를 좌천시킨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7)
나는 믿는다.
믿음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건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자기기만이거나,
신을 이용한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가짜 회개를 목격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 전 검사장이 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으며
통성으로 회개(?)의 쇼를 벌이는 동시에,
정작 피해자였던 서 검사는 좌천되고 불이익을 받았다는 점이다.
교회는 죄를 고백하고 회복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교회는 죄인을 감싸고 피해자를 침묵시킨 면죄부의 무대가 되었고,
회개는 고백이 아니라 연출이 되었으며,
용서는 책임 없는 형식으로 전락했다.
그가 정말 회개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 검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행한 악을 명확히 고백하며,
그로 인해 받은 모든 이득과 자리를 내려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는, 그 행동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얹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왜곡하는 방식이다.
회개는 회피가 아니고,
믿음은 연기가 아니며,
용서는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
바울이 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은,
곧 우리 삶에서 이렇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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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말씀이다.
진리 위에 서서 보는 눈,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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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은 신앙이다.
아직 보이지 않아도 끝을 믿는 영혼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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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행위다.
말이 아니라 손을 내미는 것. 기도만이 아니라 걸어가는 발걸음.
말씀과 믿음과 행동이 하나일 때,
우리의 세상은 그 자체로 천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