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를 남기는 것, 그리고 몇 권씩 한꺼번에 페이퍼로 정리하는 것, 이렇게 딱 두 가지 법칙을 정한 건 이번 해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저 읽은 책을 제때 정리하기 위해서 늘 페이퍼를 쓸 수는 없으니까, 우선은 읽고나면 바로 흔적을 남기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맘이라서였는지 페이퍼를 쓰는 날 사이의 기간이 점점 더 길어지는 것이다.  거기에 요즘의 내 일상이라는 것이 그리 신나는 일도 없는 편이라서 책과 함께 쓸 이야기도 잘 떠오르지 않는 등 여러 가지로 쉽지 않는 것이 요즘 페이퍼를 쓰고자 할 때의 마음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말을 달고 다닌다. 여기에 나중엔 조금 slow한 곳에서 평화롭게 남은 생을 살고 싶다는 말도 많이 하는 것 같다. 머리가 복잡할 때 늘 반복되는 패턴이 아닌가 싶다.  일도 삶도 심지어는 책읽기 마저도 어떤 정체기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뭘 해도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나이만으로 따져보면 결국 나에게도 mid-age crisis가 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어릴 땐 오히려 별로 관심이 없었던 쌔끈한 coupe이나 스포츠카 또는 classic한 아메리칸 머슬카를 하나 장만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냥 뭔가 달라지고 싶다는 몸부림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 같다.  


책읽기와 운동, 그리고 가끔 보는 영화와 즐기는 게임으로 위안을 삼는다.  신통방통한 책읽기는 그래도 꾸준히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만큼 많은 책을 쌓아놓고 싶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동진 DJ가 약 17000권의 책을 모았다고 하는데, 난 그 1/3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벌써 책을 보관하는 것이 큰 문제인데, 이건 차차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한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결국 사무실을 확장할 때 여유공간을 조금 확보해서 서고로 쓰는 것이다.  늘 보는 책과 신간으로 조금 추려서 집에 두고, 나머지는 한 군데에 보관하면 좋을 것 같다.  이사할 때마다 포장과 옮기는 걱정, 다시 배치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책은 이젠 거의 대부분 관심을 두지 않는 물건이라서 게임소프트나 영화처럼 남들의 손을 많이 타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누가 훔쳐가는 걱정도 상대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The Great War.  유럽의 관점에서만 보면 사실상 그들이 아는 문명세계 전체가 전쟁에 휩싸인 대규모의 전쟁.  우리가 아는 역사상 인류 최초로 온갖 신무기로 서로를 죽인 전쟁.  최초로 전방과 후방의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한 전쟁. 여기에 무능 그 자체였던 지도부의 집착으로 모든 군대가 현대식무기를 들고 재래식전투를 벌인 전쟁. 당시의 무기체계로 볼 때, 수비가 공격보다 훨씬 유리했던 전쟁. 


대충 생각을 해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War of Cousins.  각국의 황실과 지도층이 이런 저런 혼맥으로 모두 친족관계였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모두가 낭만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head-on collision으로 달려든 전쟁.  그리고 제국과 함께 구체제의 몰락으로 끝난 전쟁.


이 한복판에 던져진 러시아의 페시코프 형제, 윌리엄스 남매, 듀어 일가, 울리히 일가 등 각계각층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한 소설적인 즐거움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그리고 여러 계층과 이념을 대비하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때로는 모순에서, 때로는 드라마 그 자체로써, 역사를 보여준다.  여성의 권리나 노동자계층의 정치적인 성장을 비롯한 사회개혁과 변혁은 결국 평화로운 시기, 모든 것이 status quo의 시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종전과 함께 불길한 다음 시대를 예고하는 듯, 히틀러가 가십거리로 등장하여 맥주홀폭동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끝나는데, 동성애자인 로베르토가 유대인을 패배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와 같은 이념을 추종하는 사회민주당원으로 등록하는 모습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완전한 철권통치를 하려는 전야에서 시작되는 20세기 3부작의 두 번째 이야기는 모드와 발터, 그리고리 형제, 윌리엄스 남매 등 1부의 청춘들의 자식들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2차대전의 전초전이었던 스페인내전의 비극, 공산당의 전횡, 나치스가 어떤 방식으로 정권을 잡고 유지했는지, 유도된 무관심, 적절한 수준의 폭력과 일상으로의 복귀를 반복하면서 things are not bad라는 관념이 대중들의 머릿속에 이식되는 과정, 영국의 계급투쟁, 파시즘을 지지하던 일단의 세력, 미국의 무관심, 그리고 마침내 일어나는 전쟁속에서 그려지는 2세대의 삶까지.  어떤 의미로는 한국의 막장드라마처럼 1부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가는 얼키고 설켜 펼쳐지는 드라마적인 요소까지도 매우 매력적이다.  1부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볼 수 있고, 조금은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사료의 관점이 아닌 극화형식에서 오는 현장감이 대단하다.  역시 끝은 3부의 테마가 될 인권운동과 냉전의 조짐을 보여주면서 막을 내린다.


사실 2부를 먼저 읽고 1부를 읽은 덕분에 1부를 읽는 것이 다소 괴롭기도 했었다.  용감하고 멋진 발터 울리히의 최후라던가, 이런 부분이 그랬던 것이다.  역시 시리즈는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동서내전이 시작된 후 10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 1960년대가 시작.  1-2부에서 이어지는 3세대의 이야기.  지금으로 보면 딱 베이비부머의 청춘시절이 아닌가.  냉전시대의 대립과 미국의 인권운동, 케네디, 그리고 냉전이 끝나는 상징적인 이벤트였던 베를린장벽의 붕괴까지 숨가쁘게 달려간 후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끝으로 3부작이 마무리된다.  역시 끝이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속에서 지나간 반세기, 그리고 불과 9년전에 있었던 감동적인 오바마의 취임까지 정신 없이 달려오게 만들었다.  잠시 생각하니 2008년은 꿈 같다.  트럼프로 상징되는 일부의 오만함, 무능함, 무지함까지 지금은 악몽의 시간이다.  


 밖에 자투리 시간에 읽은 나머지 책.  '처절한 정원'의 감동, 'No Middle Name'의 프리퀄스러운 단편, 그리고 서경식 선생의 책 또 한 권을 읽어낸 후 2-3주 이상의 시간이 흐른 끝에 내용에 대한 느낌은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딱 보니, 책 3-4권 까지는 미뤄도 큰 문제가 없으나 그 이후부터는 워낙 많은 시간이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페이퍼로 제대로 남기기 어려울 것 같다.  엊그제 읽은 몇 권은 이번 주가 지나가기 전에 감상을 남겨봐야 한다.  


6월도 거의 다 지나간 듯.  지난 일요일엔 heat wave로 주차해 두었던 차 내부의 온도가 40도가 넘어갔었는데, 내일과 모레까진 그렇게 계속 더울 전망.  하지만 곧 하지가 오는 것 치고는 비교적 선선하게 여름을 보내고 있다.  다음 주 부터는 다시 온도가 15-25대로 유지된다고 하니 확실히 많은 비가 온 덕을 보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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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21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한건데요,
저는 책을 읽는대로 다 팔고 있거든요. 아니면 누구 주던가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제가 제 방에 놓을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어요. 제 생각엔 그게 500-600권 정도일 것 같은데요.
혹여 나중에 제가 혼자 살게 되어 책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진다고 해도, 공간을 늘리지 않는한 한계가 분명할테고, 그러면 저는 계속 지금처럼 책을 사고, 읽은 책은 팔고, 그런데 소장하고 싶은 책은 책장에 오래 꽂아두겠죠. 결국 남아있는 책, 제가 읽고 갖고 싶어 꽂아둔 책들은, 결국 나를 말해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책을 좋아하는 이런 사람.. 즉, 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가지런히 모아놨을 때, 그것만으로 분명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 같거든요. 굉장히 내밀한 일 같다는 생각이 지금 막 들었어요.

너무 다른 얘긴가요. (머쓱) 하핫.

transient-guest 2017-06-21 09:00   좋아요 0 | URL
책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나비 같은 거죠. 저는 끌어안고 주체를 못하면서도 내보내지 못하는...돼지가...-_-: 물론 저도 가끔은 다 털어버리고 왔다감을 좀 가볍게 하고 싶긴 해요. 이담엔 그래서 집에는 그렇게 5-600권 정도만 두고, 나머지는 작업실 같은 걸 만들어서 따로 보관할 생각입니다. 서재와 서고가 따로 필요한 이유죠.ㅎㅎ 책장을 보여주는 건 속살을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러울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는 제 서재를 남에게 마구 보여주는게 조심스럽더라구요. 정체(?)를 파악당하고 싶지 않은 이유죠. 나이가 속마음을 마구 나타내면 좀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나이라서 더더욱.ㅎㅎ

너무 다른 얘기는요 뭘. 아무 얘기나 하셔도 좋아요.ㅎㅎ 이번에 이모 작가가 쓴 ‘잘 지내나요?‘도 왔네요. 곧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ㅎ

cyrus 2017-06-21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보는 책과 관심 없는 책, 이렇게 따로 구분해서 보관해봤어요. 그런데 가끔 관심 없는 책 중에 읽고 싶은 게 있어요. 하필이면 그 책이 구석에 있어서 그거 꺼낼 때 힘들었어요. ^^;;

transient-guest 2017-06-21 09:01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 그렇게 밑이나 구석에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둔 책을 찾아 꺼내느라 고생을 하곤 합니다.ㅎㅎ 심지어는 박스에 보관하는 걸 갑자기 찾느라 난리를 치기도 하지요.ㅎㅎ 말씀을 보니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 생각나네요.

목나무 2017-06-21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켄 폴릿의 ‘20세기 3부작‘ 완독하셨군요. 1부만 읽고 이번 여름휴가때 나머지 2부, 3부를 읽으려고 아껴만 두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진짜 이런 대작은 한번에 주욱 읽어야 하는데 말이죠. ^^
<처절한 정원>은 정말 오래전에 읽었는데 덕분에 오늘은 퇴근해서 이 책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책보관 문제는 저도 늘 고민이라... 지금까지 힘겹게 1000권 정도의 책을 짊어지고 이사다녔는데 그 이상은 힘들 것같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지더라구요. 내가 꼭 보관해야할 책을 선별하는 기준을 만들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

transient-guest 2017-06-21 12:45   좋아요 1 | URL
아껴서 두었다가 좋은 날, 책이 땡기는, 그러나 오랫만에 한가해서 하루 종일 나한테 쓸 수 있는 그런 날. 연휴 같은 때, 에어컨 시원하게 켜놓고 차가운 걸 마시면서 뒹굴거릴 여유가 있을 때 읽으시면 좋겠어요. ㅎㅎㅎ

책을 정리하려고, 그러니까 줄이는 고민은 해본 적이 없어요. 늘 책을 사 보았지만, 원하는 걸 꽤 많이 사들이기 시작한 건 이제 5-6년 정도에요. 보관과 정리에 늘 고민하지만 아직은 새로운 책이 반갑기만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