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밀린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는 수준에서 일단 다시 노력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서재가 애초에 아니었음에도 그간 많이 관심을 받고 좋은 글을 받으면서 조금씩 다른 이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일종의 '블로그'질을 하는 이유에 어찌 타인의 관심이 완전히 배제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최근의 performance와 알라딘의 경향을 보건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이다. 물론, 2016년도 '서재의 달인'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나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헐리우드의 영화에서 온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원초적인 공포와 나찌의 만행, 영웅적인 저항, 수형자들끼리 서로 보듬어 주는 모습, 우정(?) 같은 것에서 우리는 유대인 = 희생자라는 등식과 폭력 = 나찌의 등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나쁜 일, 예컨데 폭력과 살인 같은, 대량살상이 아닌 매일 같이 일어났다던 폭력의 절대다수는 수형자들에 의해 서로에게 저질러졌다는 이 책의 기억과 분석 - 다른 내용 외에도 - 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구조적인 이유로도 그랬겠지만, 인간성을 빼앗긴 자들의 발악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해석되는 않는 다양한 고찰을 제시하는 이 책은 너무도 솔직하게 불편한 면이 없지 않다. 아무래도 나찌가 지배한 유럽의 다른 지역들보다는 상황이 좋았던 이탈리아의 유대계인 레비의 경우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수용소로 보내졌던 만큼 좀더 다른 경험을 했을 것이고, 이에 따른 다른 기억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이 책에서 제시하는 것들이 모두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 시점에, 한 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을 남겼다는 점에서 레비가 말한 것들은 전쟁 내내 수용소에서 유대인들 또는 수형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의 샘플일 수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래 자신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했던 탓일까, 독일의 전후세대와 직접적인 전쟁세대에게서 보여진 기억의 왜곡과 부정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 복잡한 속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이 제시한 나름대로의 이유에 완전히 설득되지 않는 건 그는 죽었고, 그를 죽게 만든 사건의 원흉들 - 책임자들 말고, 일반 대중으로서의 - 은 삶을 이어갔다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외에도 악의 대중성, 악의 없이 행해지는 악, 매일의 악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중국의 현대소설은 확실한 신선함이 있다. 그간 읽어온 서구의 고전이나 인기소설과도 다르고 일본의 근대문학이나 소설과도 다른 풋풋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뭔가 시골스러움을 보는데, 이건 물론 몇 권 채 읽지 않고 하는 말이니까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짤리고 우연한 기회에 사설 러브호텔을 운영하는 '사부님'의 이야기도, 불까기를 하고 나서 죽은 소를 둘러싼 이야기의 결말도, 무척 우습고, 은근히 체제에 대한 비판 같기도 하고, 그냥 골때리는 이야기로 치부되기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위화나 모옌도 그렇고 다양한 중국작가들의 책이 계속 나오는 건 고무적이다. 이제까지 중국의 책이라고 하면 사서삼경이나 삼국지 같은 역사소설, 루쉰과 무협지 정도만 생각했는데, 얼마나 많은 좋은 작가들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책 여러 권을 읽어가면서 한 페이지 정도의 후기를 남겨 이를 모은 책이 있다면 이렇게 몇 권을 작심하고 다루는 책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앞서 읽은 '서서비행'과 함께 구했고,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부럽기 때문에 그렇게 글쓴이를 동경하면서, 하지만 주로는 하~ 어떻게 그런 일로 먹고 살지? 하면서 흥미있는 그의 돈키호테 이야기로, 가르강튀아, 걸리버 여행기, 그리고 전혀 모르는 다른 책들 몇 권을 소개 받았다. 덕분에 돈키호테를 해설한 책과 가르강튀아를 주문했거나 보관함에 담았다 (당분간 책주문을 정말로 자제해야 할만큼 많은 책을 약 한 달의 기간에 주문했고, 그 액수는...중소기업의 일반경력직 한 달 봉급...-_-). 글을 풀어나가는 솜씨도 좋고 흥미있는 책을 잘 골라서 이야기를 풀었지만, 조금은 익숙해짐이 필요한 또 하나의 풍이다. 장정일의 예전 글도 좋고, 로쟈님도 좋고, 마태우스님의 글도, 그 밖에 일일이 거론하자면 약 150-200권의 책을 이야기 해야할 다양한 '책'에 관한 다른 책들처럼 글쓴이의 '풍'도 익숙해질 것이다. 가끔 보이는 그의 시대비판이나 모 독서맨토에 대한 sarcasm에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는데, 누군가 이런 독서-성공학에 대한 비판서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한때 열심히 읽었고, 잘 받아들이면 좋은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역시 독서-성공학-자계서는 그 책을 쓴 사람이 성공하는 책이지 읽은 사람이 성공하는 책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기(?)는 보다 더 심층적으로 분석되고 파헤쳐져야 한다.
원제가 따로 있는 이 책은 SM의 걸그룹 '소녀시대'가 등장하던 시기에 맞춰 '프라하의 소녀시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이 판본 이전의 이름이 reference되지 않는다. 어느새 소녀들은 처녀가 되었고 그들의 '소녀'시대는 이미 2세대, 3세대 혹은 4세대 아이돌들이 공장식 제조와 판매를 통해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요네하라 마리는 이미 고인이 된 일본의 작가인데, 공산당이던 아버지의 부임에 맞춰 동유럽에서 십대를 보낸 경험이 있다. 이 책은 그때의 추억과 함께 당시 '소녀시대'를 함께 누린 친구들을 나중에 성인이 되어 만난 후일담으로 엮어 낸 책이다. 어린 나이에도 나름대로는 어른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간 당시 어린 소녀들의 우정도, 이야기도, 또 일부는 변해버린 나중의 모습도, 중년이 된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랬기에 열혈투사에서 쁘띠 부르조아의 모습으로 상류지향을 삶을 사는 한 친구도, 계속 투사로 남은 친구도 요네하라 마리의 씁쓸함은 차치하고라도, 만나면 반갑지 않았을까?
(1) 가족과 함께 베네주엘라로 돌아간 호세의 가족이 모두 총살당했다는 소식 (호세는 그냥 아이였다), 그리고 (2)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폭격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 친구의 이야기에서 사상과 전쟁의 무서움을 새삼 느꼈다. 점점 안정이 사라지는 시대, 서구를 기준으로 큰 전쟁이 없은지도 60년이 넘은 지금, 어디선가, 언젠가 큰 전쟁이 일어나거나 변혁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에 가끔 남은 생을 걱정하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전쟁과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써내려가니 쉽다. 잠깐이지만 다른 이들이 잘 쓴 글을 읽지 않은 덕분일 수도 있겠다. 부러워하지 말고 그렇게 그냥 남기자. 그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