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확실히 다르다. 바쁜 탓도 분명히 있지만, 책읽기가 조금씩 막혀가는 느낌이다. 잠깐이지만 슬럼프가 온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플루토'라고 무척 재미있는 만화책이 있다. 아톰을 원작으로 하여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 일부를 차용한 작품인데, 처음 읽으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했던 작품이다. 그간 쌓아놓았다가 뜯어서 한 권을 읽었는데,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무려 '우라사와 나오키', '아톰', 거기에 오마쥬한 엄청난 작품인데 말이다. 딱 그런 상태가 불안하게 이어지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는것이 2015년 현재의 모습이다. 그래도 집에 가면 'American Sniper'원작을 조금씩 읽는 등 노력아닌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신경쓰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흠뻑 빠져서 재미있게 책을 붙잡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중물을 부어도 안되면 어쩌지...
일단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이 양반이 워낙 신비주의 잘 가져다가 소설인지 경험담인지를 알 수 없게 버무리는 재주가 뛰어난지라 특히 그런 부분을 가리는 것은 쉽지 않겠다.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한때 특히 유행했던 것은 알고 있고, 지금도 꾸준히 잔잔한 이야기들을 퍼뜨리고 있다는 정도의 익숙함은 있다.
지금말고, 예전에, 그가 젊었을 무렵에는 특히 서양인들이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시절이었을게다. 흔히 말하는 히피들의 전성시대.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하루에 갈 수 있는 평균치의 길마다 역참이 잘 준비되어 있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때만해도 수도원아 아니면 가난한 마을에로 점점이 이어져있었던 시절의 이야기. 내면의 무엇을 찾는 여행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 결사에서 부여된 어떤 과정을 수행해나아간 듯한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는데, 불교의 선종처럼 카톨릭에도 이런 방향에 좀더 중점을 두는 분파 또는 비밀단체가 없지는 않을 것이고, 그 뿌리는 아마도 저 먼 옛날 사막의 성자들이나 영지주의까지 거슬러올라갈 것이다.
개념으로만 보면 선이나 악이나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많은 것들처럼 이들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선하기 위해서 악을 밟기보다는 내면적으로 이를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이 종교적인 논리로 가면 이원론에 닿게 된다. 어떤 균형적인 개념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 내부의 악마와 대화를 시도하고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맘속의 모든것을 받아들이고 투영하여 균형을 잡고, 총체적인 자아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주인공의 산티아고 순례가 아니었나싶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선의 개념도 아마 이 시절 서양인에게는 매우 새로운 배움이었을게다.
차분하게 다시 읽으면서 한 구절씩 음미하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바로 다시 읽게 될 것 같지는 않고, 다른 여느 책들처럼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다시 운명적으로 손에 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벌써 22권째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스쳐가는 나그네께서는 여전히 이런 저런 사건에 휘말려 극강의 상류층 귀족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만든 Sacred Ancestor, 말 그대로 성조를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eternal 순례라고 하겠다.
완전한 우연이지만 위의 책과 함께 '순례'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이라고 억지를 부려본다. 이 세상것이 아닌 차가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모든 여자가, 아니 남자도 반하게 만드는 D는 이번엔 무려 10000년간 땅속에 봉인되었다가 튀어나온 귀족과 싸워야 한다. 그냥도 강한데, 벰파이어들이 지배하던 시절에 있었던 외계인류와의 전쟁에서 얻어진 과학기술과 생명공학을 접목시킨 강력한 상대이다. D가 이기면 인간세상이 이어지고, 그가 이기면 다시 벰파이어들의 세상이 될 수도 있는 전투에서 당연하게도 D는 또 이긴다 (22승 무패). 그저 재미로 읽는 소설인데, 딱히 뭘 배우거나 느끼는건 없지만, 그래도 읽던 관성이 있어 항상 신간을 기다리게 된다. 기괴한 상상력은 언제나처럼 맘에 딱 든다. 서기 120하고도 수세기라니. 인류문명이 붕괴하고, 이때를 틈타서 나타난 흡혈귀들의 엄청난 과학문명과 인간노예/음식화, 그런데 이것도 시간의 흐름속에서 쇠퇴하고 다시 인간들이 득세하지만, 세상은 잔존하는 흡혈귀들과 그들이 만든 괴생물체와 왜곡된 자연환경 때문에 중세와 서부개척시대를 합친 거칠고 험한 곳이다. 이곳을 마치 현상금 사냥꾼처럼 돌아다니는 D와 그와 얽힌 사건/인물의 구성/구도는 늘 높은 재미를 선사한다. 한국어로는 나오다가 끊겼는데,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권수가 딱히 중요하지는 않지만, 꾸준함의 척도정도의 의미는 있다. 이번 해에는 처음으로 200권을 넘기지 못할만큼 더딘 한 해의 수행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