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 - The Clien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뒤늦게 <의뢰인>을 보았다. 보고 나니, 역시 손영성 감독답군,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점은 초반의 정황증거를 거의 마지막까지 끌고간다는 점이다. 중요한 정황증거들은 영화의 초반 브로커(성동일)나 사무장(김성령), 또는 강변호사(하정우)의 입을 통해, 혹은 감독의 장면 제시로 인해 친절하게 이미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아내가 살해당했고, 남편은 살해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전혀 없고, 남편이 들어오는 것을 본 목격자의 진술도 있으며, 아내는 심지어 며칠 전 남편에 대한 심한 공포심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오로지 정황증거일 뿐이라는 것. 흉기도 사라졌으며, 무엇보다도 사체가 없다. 실제 증거가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대부분 이런 영화, 장르물에서는 중간에 무엇인가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며, 사건의 급박한 전개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사체가 발견되거나, 보다 직접적인 증언을 해줄 목격자가 나타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흉기라도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안검사(박희순)가 최후진술에서 이런 말로 발언을 시작한다. 인정한다고. 정황증거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음을 인정한다고 말이다. 아마 장르영화 팬이라면 여기서 "장난해?" 정도를 속으로 외쳤을 법도 하다. 도대체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 동안 무엇을 한걸까. 우리는 도대체 이 시간 동안 무엇을 보고 앉아있던 것일까.

그 빈 러닝타임을 이 영화는 맥거핀들로 채운다. 영화의 중간중간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출현한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있다. 촛불, CCTV, 교통사고 목격자, 사라진 가짜시체(더미)...그러나 이것들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면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사건의 향방을 뒤엎을 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 내내 감독이 던져주는 떡밥들에 차례로 낚여 긴 시간동안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반전이 발생한다. 범인이 아님을 눈물로서 항변하고,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오로지 정황과 인상만으로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가 재판에서 결국 무죄판결을 받지만, 사실은 그가 진범이라는 그런 반전이. 이것을 과연 반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조금 옆으로 밀어놓고라도, 그러니까 단순히 이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떡밥들을 물다 못해, 결국은 2시간 동안 거짓말만 본 셈이다.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대담한 법정극의 전말, 신기루와 같은 성들. 우리는 이 신기루 오아시스들을 앞에 놓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허망함만을 느껴야 하는 걸까.

손영성 감독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계획했을 것이다. 일단 먼저, 그는 전작 <약탈자들>에서 전력이 있다. <약탈자들>은 여러 거짓(혹은 진실)들이 촘촘하게 얽힌 거대한 미로와도 같은 영화였다. 우리는 그 영화에서 곳곳에 놓인 허방다리들을 만났고, 기꺼이 그 허방다리들을 밟고 어둡고 막막한 어지러움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결국 목적은 그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진 미로인지를 깨닫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번 영화 <의뢰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변호사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 이야기한다. 사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실외에서 일어났는가, 실내에서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번 사건과 같은) 실내 사건의 경우 증거가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포인트는 '스토리'를 잘 짜맞추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랬다. 문제는 그 '스토리'였다. 스토리를 얼마나 잘 만들어 관객(배심원)들을 그 스토리 속에 빠뜨릴 수 있는가의 여부. 그것을 간파한 강변호사는 중간에 약간 위험하고 대담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한철민(장혁)을 도리어 자신이 자극하여 스토리의 결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왜냐하면 스토리에서는 결국 감동이 중요하고, 개연성이라는 것이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놓고보면 사실 마지막의 반전은 반전이 아닌 셈이다. 즉 그 반전의 목적은 관객을 다른 결말로 이끌기 위함이 아니라, 이 2시간 동안 본 이야기 자체조차도 결국은 거대한 거짓말, 혹은 만들어진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반전 그 자체의 전개 과정만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남자가 있고, 그에게는 정황증거밖에 없다. 그러나 그 범죄를 입증하려는 쪽은 무엇인가 영화내내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남자는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계속 항변한다. 이 영화에 어떤 반전이 있다고 할 때 당신이 익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가 결국 범인이 아닌 것은 당연히 반전이 될 수 없다(그게 반전이라면 검사측에게 영화 내내 그렇게 뭔가 미심쩍은 뉘앙스들을 켜켜이 쌓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상가능한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예상가능한 선택지는 물론 반전으로서의 기능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예상가능한 선택지를 고의로 하나밖에 남겨두지 않은 이 이야기를 <프라이멀 피어>나 여타의 반전극과 비교하는 것 또한 조금은 민망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영화가 대중영화가 아니었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그 친절한 설명적인 결말보다는, 강변호사의 쇼가 펼쳐질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떠한 미동도 없이 살짝 미소만 짓는 한철민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끝내는 것은 어땠을까. 진실은 저 너머에...)

결국 이 영화는 진실이라는 것은, (정황적인) 이야기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증명할 아무 실체가 없이 오로지 이야기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의 무서움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 속 강변호사는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패배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승리했다. 정황증거로만 판단하는 것이 어떤 잘못된 판단을 야기할 수 있음을 스스로의 행위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의 식대로라면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 - 범인이 아닌데, 범인으로 형을 받는 경우 - 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보다 무서운 점은 우리는 그런 속에서도 무엇인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조금 돌려 질문을 한 가지 해보면, 만약 우리가 이 영화의 배심원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배심원이라면 이 영화를 본 관객들보다 더욱 제한적으로 사건을 알 수 밖에 없다. 그 제한적인 사실만을 놓고, 배심원은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어떤 특정의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아주 작은 문제에서부터 한 사람의 생과 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떤 판단을 내린다. 그 판단들에서 생겨나는 어지러운 균열들을 전작 <약탈자들>에서부터 이 영화 <의뢰인>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흥미로운 이야기의 외피를 두르고 그려나간다. 본인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대중영화로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좋은 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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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1-1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계속 뭔가를 쓸까말까 고민하던 차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던 내 심경을 표현해주는 글을 '한겨레21' 이번 호를 읽다가 보았다. 아..그런 것이었구나 생각했다.

"사회평론가 박권일씨는 한 사이트에 연재하는 '표준 시민'이라는 글에서 지금의 국면을 "이명박과 한나라당이라는 절대악과 동지(우리 편)를 구분하는 적대의 정치"라고 표현했는데, 트위터상에서는 '적대의 정치'가 140자로 좀더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냥 소소한 블로거로 영화평이나 가끔 써야겠다.

2011-11-16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8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0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년의 학교는 상당한 고급 아파트촌과 그저그런 주택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소년들은 거의 정확히 두 세계로 나뉘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입성과 도시락 반찬들만 보아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교복은 아무 것도 감추지 못하고,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사실 그것을 정확히 나뉜 두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한 세계가 다른 한 세계 안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소년들은 사실 많은 것을 안다.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들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며, 어디가 가장 약한 지점인지도 안다. 한 세계의 소년들은 끼리끼리 몰려다녔고, 다른 한 세계의 소년들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차례로 타겟이 되었다.  

그저그런 주택가에 살며, 그마저도 변변치 못한 축에 들었던 소년은 그래도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소년들의 학력 수준은 당연하게도 부모의 부의 종속변수가 된지 오래였다. 나뉜 두 세계는 그들의 현재만을 말해주지 않았고, 우악스럽게도 미래의 세계를 펼쳐내보이고 있었다. 운이 좋은 소년이었지만, 타겟의 운명을 그렇다고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몇번인가 책을 잃어버렸으며, 노트에 찢어진 자국을 발견했고, 한 두 번은 가벼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나 아무튼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에 속했다. 그래도 쥐꼬리만한 선생님의 관심을 받았고, 그것은 그나마도 없는 소년들에 비하면 꽤나 든든한 방패에 속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소년들은 차례로 타겟이 되었고, 다음 새로운 흥미거리가 생겨나기까지 그 극장의 배우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바톤을 넘기고는 어느새 그 극장의 관객이 되었다. 

소년은 사실 많은 것을 잊으려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실제로 많은 것을 잊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때 일어난 일들 자체만큼, 그 때에 가졌던 느낌과 생각들도 잊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를 기억한다. 그 그룹의 소년들 중 자신을 유달리 괴롭혔던 S군과 그가 갑자기 교문 앞에서 따귀를 날리고 지었던 미소를. 갈색의 철봉들로 만들어졌던 그 교문과 그 교문을 둘러싸고 있었던 담쟁이 덩굴들을. 그 그룹의 소년들 중 그래도 소년에게 가장 친절을 보여줬던 J군을 졸업식날 기어코 찾아가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과 그 때 그가 지었던 또다른 의미에서의 어색한 미소를.  

1992년의 어느 풍경들. 그 짧고도 짧은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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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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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돼지로 살 수밖에 없었고, 돼지의 왕이 되고 싶었으나 끝끝내 되지 못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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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들어와 가끔 놀라는 때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일방적이며,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글들이 높은 추천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이다. 정확히 말해서 놀란다기 보다는 그저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일단은 이 알라딘이라는 공간의 특성적인 문제. 내 추측일뿐이지만, 아마도 이곳에는 책을 좋아하고, 그만큼 글쓰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들이 다수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글들도 결국은 어느 정도는 타 곳들과 비슷해진다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것은 결국 어떤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어쩌면 그런 것을 폭력적이며, 일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나의 성향이 이상한 착각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에 들어서 내가 쓰는 글들이 퇴보를 향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무지 발전이 없고, 계속 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얼마전 내 블로그 글들을 자주 읽어주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의 말로는 내 글이 너무 '모호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후에 내가 지금껏 쓴 글들을 꼼꼼이 다시 반복하여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내 블로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은 '일종의 문제', '~수 있다', '어떤 경향성', '조금은', '~까', '부인할 수 없다' 등등이다. 어떤 것이 좋다고도, 그리고 혹은 나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는 모호함의 문제, 회색의 덧칠들 그런 것들이 너무 눈에 띈다. (즉 글이라는 것이 결국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함임을 전제로 했을 때, 나 자신도 읽으면서 안개 속을 걷는 형국이라면, 누가 그 글을 읽겠는가.) 

이제 이런 나약한 글쓰기는 그만두고 치열하게 부딪히는 환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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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듯해요. 어떻게 된 것이 책은 읽을수록 읽어야할 책은 점점 더 많아지는지.. 그리고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가 겁나고 매사에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이 두려워져요.

맥거핀 2011-10-31 20:58   좋아요 0 | URL
한 때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많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분명히 나보다는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를 보면요. 아는 것과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갖추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일까..도리어 많이 알게 될수록 말하기가 힘들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아는 척'만 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생각을 해야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요.

꽃도둑 2011-11-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을이군요...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사색의 계절..
맥거핀 님의 생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거에요. 무엇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듯 싶은데요... 누구처럼 써보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나를 넘어서는 일이어야 할텐데...한계라는 것은요..쉽사리 무너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는 나를 보곤 하죠...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 길밖에는 없는데...
뭐 굳이...저는 그래요. 뭐 굳이.. 그냥 쓰는 순간 몰입하고 그걸로 잊어버리곤 하죠..^^
그리고 어디가서 별로 아는 척 안해요 쩍팔려서...^^


맥거핀 2011-11-02 01:20   좋아요 0 | URL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하는 고민인가요..? 그래요. 확실히 뭔가를 넘어서기는 해야하는데, 자주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연 이게 올바른 방향인가, 이게 더 나은 것인가 의문도 들고..하기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도 예전을 돌이켜보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예전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글들을 지금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별 감흥이 없거나, 도리어 싫어지기도 하니까. 그만큼 자기 기준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렵다고 해도 노력은 해야죠.^^

마녀고양이 2011-11-0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맥거핀님께서 저랑 같은 날짜에 유사한 맥락의 글을 올리셨었군요.
따스하게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는게 제 생각인데,
댓글에서 다른 의견이 있었답니다. 그 정도 글은 글쓴이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 자체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죠. 음,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구나 하고 한참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그런 글을 주고 받는게 일상화된 분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자와 여자 또는 직업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면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추워지는데, 따스한게 저는 좋습니다만. ^^

맥거핀 2011-11-02 20:56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몇몇 글을 보고나니, 뭐라고 말을 잘 못하겠네요. 다만, '이것이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르다는 말로만 봉합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물론 마녀고양이님께 뭐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제 블로그 대문에 쓰인대로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따스한게 좋습니다.^^
 
약속 - The Promis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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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몫이 없는 사람들에게 향함으로써 결국은 자기 구원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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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3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은 항상 숭고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자기구원의 시작은 (타인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것일 것이다. ...나는 나를 경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