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브 - G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 조금)




이 영화 <글러브>에 대해서는 <씨네 21> 789호 '전영객잔'에 실린 안시환의 평에 대체로 동의한다. 안시환의 평은 이 영화가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하려는 혐의가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조금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간의 스포츠 영화들, 특히 한국적인 감동 강조류 스포츠 영화들에 나왔던 거의 모든 클리셰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단 하나만은 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 빠져있는 것은 선수들 개개인의 개인사를 의식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선수들 개인의 여러가지 힘든 개인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에서 감동의 눈물을 짜내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인사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것은 투수인 명재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야수들은 그 흔한 아버지 한 명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편집과정에서의 어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간에 팀을 떠나는 선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떠나는 이 어린 선수에게 카메라는 비정하게 등을 돌린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결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그는 공동체를 버렸을 뿐이고, 공동체도 그를 버렸을 뿐이다. 이것에는 안시환의 평대로 확실히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의 혐의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우석의 최근의 다른 영화들도 (익히 분석되었듯이) 비슷한 혐의들이 도사리고 있다. <실미도>, <공공의 적> 시리즈, 최근작 <이끼>까지도.

안시환 평론가가 '전영객잔'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해버렸으므로, 특별히 더 덧붙일 말은 없지만, 그저 나름의 생각을 조금 더 붙여본다. <글러브>는 따뜻한 감동스토리의 외관을 두르고 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걸까..하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위의 공동체주의 같은 부분들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강우석이 그려왔던 세계들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무서운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물어뜯는 무서운 사회이다. <실미도>나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의 적>의 아주 차갑거나, 아주 뜨거운 지옥의 세계, 그리고 <이끼>의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글러브>는 조금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선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의 분신같은 캐릭터인 김상남(정재영)이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에게 주자가 무릎을 아작내겠다(?)라는 기세로 달려들라고 가르치는 부분 같은 것. 김상남에게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김상남에게 야구는 이겨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기는가는 그에게 그렇게 크게 고려해봐야 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주 당연하게도, 왜 이겨야하는가, 혹은 이기는 것이 왜 필요한가는 아주 조금도 고려할 사항이 못된다(즉 이기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는 사실). 아니면 다른 부분, 군산상고 선수들에게 성심의 선수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라고 하는 부분. 이 부분은 음악과 편집의 효과로 김상남이 매우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처리되지만, 나는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저것이 옳은 것인가. 약자를 동정하는 것, 약자를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될 일인가.

물론 이 장면은 여러 효과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군산상고 선수들이 마치 이들을 놀리듯이 성의없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이 장면이 처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배제하고 보면, 이 장면은 확실히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스포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지만, 약자를 조금이나마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더구나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심의 선수들은 청각장애라는 결정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누군가는 분명히 반박할 것이다.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고 야구를 하려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여 승리하는 것, 혹은 패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점이라고 말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비장애인과 동일한 위치에 서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고.

강우석 감독은 명백하게 후자의 손을 든다. 김상남이 원하는 것은 이들이 비장애인의 세계, 이들에게 배려가 없는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 뛰어들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라는 나교사(유선)의 시각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더 철저하게 짓밟혀서 가슴 속 울분을 이끌어 내라는 것이기도 하고,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의 무릎을 날려버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김상남은 감독의 분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우석 감독의 태도는 다른 몇몇 곁가지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김상남 본인과 관련된 부분들. 김상남이 야구계를 떠나게 된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러 사고를 연이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야구계에서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즉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한국야구의 엄청난 스타였다면 그가 버려졌을까. 어떻게든, 그는 구제되었을 것이 아닌가. 김상남의 매니저는 항변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우석의 항변이기도 하면서 그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퇴물이 되면 버려지는 것,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을 길러야 한다. 마찬가지.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 그들은 살 수가 없다.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그 세계에 뛰어들어 이겨내야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강우석 감독의 시선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인도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할 뿐이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그런 힘들로 이루어진 세계야. 이 세계는 어차피 바뀌지 않아. 그러니 그저 중요한 것은 네가 강해지는 것 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상대방의 장점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것 뿐이야.

그러므로 한편으로 나는 그가 말하는 일종의 '희망'에 의문이 생긴다. 그 희망은 어떻게든 이 힘겨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사투에 의해서밖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인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시스템으로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보다는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에 의지해서, 혹은 그마저도 없다면, 각 개인의 처절한 고투와 기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안시환의 지적대로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이다. 대표적인 장면. 투수인 명재의 어머니는 명재가 성심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을 못 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 장애인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재에게 항변한다. 너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 수 있어. 걔네들과 달라. 이렇게 말하는 명재의 어머니와 강우석 감독의 논리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즉 장애인을 점차 비장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것. 그러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영화는 이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는다. 즉 이상하게도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이 어머니에게는 부정적인 점수를 준다. 그것은 강우석 감독이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만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강우석의 '희망'에 대한 정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마지막을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의 세계는 여전하구나. 그 세계는 가장 아이러니컬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가 주어지는 세계다. 혹은 승리했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주어지는 세계다. 그 세계는 여전한 '그 세계'다.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예를 들어 <실미도>의 그들에게는 어떠한 마지막이 결국 주어졌는가.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끼>의 류해국은 어떤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세계에서 최소한(이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한다. 그들이 힘을 길렀을 때만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의 박수는 결코 그들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궁금해진다. 시스템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시스템안으로 들어가려는 싸움. 시스템은 그대로 내버려둔채 벌어지는 별개의 사투들, 유리된 희망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덧.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역시 쓸데없이 글이 (조금은) 길어졌다. 그러나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아무튼 강우석 감독은 스트레이트하다. 물론 가끔은 영화의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다른 부분들까지 너무 스트레이트한 것이 (꽤나 큰)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트레이트한 것은 때로 촌스러움과 연결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몇몇 부분은 거의 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야기에서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즉,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던진다. 그것이 강우석 감독의 단점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확실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오 2011-02-0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으로는 강우석 감독 마음에 드는 작품이 이끼였던것 같아여,,그의 초기작들을 더 좋아하는편이지 만여..달콤한 신부들, 행복은 성적순, 누가 용의 발톱을(강제규 각본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강제규가 영화감독하지말고 차라리 각본을 더썼으면 거의 폴슈레이더급인데 ㅎㅎ) 그런반면 한반도 너무 손발을 오글거리게 만들더군여~

맥거핀 2011-02-09 22:24   좋아요 0 | URL
강우석 감독의 초기작 얘기를 하시니, 예전에 학생 때 친구랑 <미스터 맘마> 같이 보러갔던 기억이 나네요(왜 그 영화를 보러 갔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강우석 감독을 보면, 기획력이나 관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은 잘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물론 미장센을 중시하는 씨네필들에게는 거의 무시당하기는 하지만요. (일반관객과 시네필이 뭐가 다르냐는 질문이 여기에 필수적으로 뒤따르겠지만..)
가끔 특정 분야만 했으면 하는 감독들이 있지요. 감독하지 말고...시나리오는 직접 안 썼으면 좋겠다 싶은 감독도 있구요. (방금 전에 故 최고은 씨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던데,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들이 많아지는 추세도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참..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녹색광선 - The Green Ra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고정된 카메라로 보는 고정될 수 없는 미묘한 심리들. 마지막 녹색광선을 보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살의 - Intentions Of Murd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6부작 미니시리즈를 압축한 느낌. 이 여자, 웃기고도, 안타깝고도, 섬뜩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오 2011-02-1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봤습니다..단 한번의 줌인에 그냥 쓰러졌습니다..심리 스릴러 서스펜스라면 이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여? :)

맥거핀 2011-02-14 21:42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에 하나네요. 지금까지 이번 영화제에서 본 작품 중 가장 좋아요. 이마무라 쇼헤이의 초기작들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명불허전이더군요.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상 생활에서 때때로, 아니 의외로 꽤나 자주,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리고 술자리에서건 어디에서건, 많은 경우 그것은 의도치 않은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성있는 논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것은 어떠한 '반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라는 말에 이르면, 논쟁은 이미 김이 빠져 버리고 만다. 뭐..그걸 내가 꼭 신경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정치인들이 열심히 생각해야지.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사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런 건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 <진보집권플랜>을 읽기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는 MB정부의 실책들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주를 이루겠지, 그리고 말미에는 그래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논의하고 있겠지. 그러나 이 책의 전체 줄거리는 내가 생각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자 오연호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조국과 문답을 벌인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진보가 만들어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사회 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의 크게 4가지 부분에서 앞으로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진보가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진보 세력이 실제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짜야하는지, 실제의 인물들과 조직들을 거론해가며 논의를 펼치고 있다. 즉 이 책의 제목인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플랜'이란 '진보가 집권하기 위한 플랜'이 아닌 '앞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법(디자인)'이라는 측면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이라는 말보다는 '정의'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단, 물론 이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권력이든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反 MB'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좋은 세상은 '反 MB'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좋은 세상을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것인가라는 디자인이, 플랜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가 흔히 공격을 받는 지점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진보는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만,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되면 좋기야 한데, 그것이 실현 가능하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현재의 실정들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시된 대안들의 상당수는 정책의지만 있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일정 부분에서는 기존에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엿보인다. 즉 조국 교수의 말들은 과거에 무게중심이 놓여있다기 보다는 명백히 현실지향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한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다. 먼저 한 가지는, 미래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소위 '진보 정권'(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동안에 이루어진 몇몇의 실정(失政)들에 의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두루뭉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미 FTA 문제,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문제, 카드 대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등. 물론 몇몇 말들을 첨언할 수 있다. 먼저 조국 교수가 사실 이에 대한 반성을 할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점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이 실정인지 아닌지의 문제도 여전히 일종의 진행선상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는 시각이 앞으로의 진보 세력의 연합에 있어서 하나의 무게추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단적인 질문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민주당 정부를 진보 세력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조국 교수는 이에 대해 사실 이미 '그렇다'라는 답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짜여진 정치지형에서 '反 MB'의 구도에 주목하면 민주당을 넣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조국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사실 '反 MB'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점이 아닌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첨언하고 싶다. 하나는 전체 논의의 틀을 '진보'가 아닌 '진보, 개혁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조국 교수의 단적인 선택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 한편으로는 책의 전체 논의가 너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다(오연호 기자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은 이외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남아 있는 민노당의 북한에 대한 태도, 국민참여당과 민주당과의 차별성의 문제, 진보신당의 비유연성 등등.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같이 그려나가야 할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려면 그 좋은 세상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권을 잡기 위한 연대는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현재 진보 진영의 각 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들의 '다른 점' 그리고 연대가 어려운 점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 다른 점들을 깎아 나가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감춘 연대는 언젠가 깨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이는 점은 또 있다. 좋은 세상도 좋은 세상이지만, 그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만 자꾸 보이는 탓이다. 오연호도 뒤의 에필로그에서 말했지만, 조국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국 교수에 주목하게 된다. 진보 진영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 조건들에 부합하기로는 조국 교수만한 인물도 몇 없다.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면도 그렇거니와 (약간 농담을 섞자면) 그의 외모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꼭 농담만은 아닌 것이, 정치에 있어 겉보기의 중요성은 한나라당의 모 의원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은 조국 교수의 전체적인 틀을 딱히 가늠하기가 주저되는 면도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의 중에는 우리나라의 아직 수준으로는 이 정도, 더 나아가고 싶지만 이 정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종종 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의 현 지점에 비추어 긍정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실제로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정도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과연 그에게 그가 말한 세상의 조건들이 일정정도 성립되면,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그의 앞날이 궁금할 밖에. 책의 말미에 그는 '폴리페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폴리페서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하긴, 누구에게나 정치 행위는 필요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오 2011-02-0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아~ 요새 글쓸시간이 없어서 후속글 남겨지는게 계속해서 미뤄지네요^^ 그리고 영화보러 영상원, 아트시네마 열심히 다녔습니다. 감독들 GV있을때마다 거의 참석을 하면서 도대체 무슨이야기 하는지 궁금해서요,,맥거핀님도 아트시네마에서 이마무라와 에릭을 보셨군요^^, 그럼 좋은 구정 되시길~

맥거핀 2011-02-02 21:35   좋아요 0 | URL
후속글은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저도 뭐 그렇게 열심히 글쓰는 편도 아니니, 다른 분 탓할 거리도 못됩니다.아..좋은 영화 보러 다니느라 바쁘시군요. 저도 말씀하신대로 시간이 좀 있어서, 이마무라와 에릭 로메르를 만나고 왔습니다. 좋더군요. 특히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위 영화는 상당히 감탄하면 봤습니다.
좋은 영화들 많이 만나셨으면, 언젠가 그 얘기도 좀 들려주세요. 이거, 요청만 많아지는 것 같네요. 연휴 잘 보내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라는 이 책은 1971년 네덜란드에서 벌어졌던 미셸 푸코와 노엄 촘스키, 두 사상가의 TV토론을 기본 축으로, 인간성과 정치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토론의 사회자 폰스 엘더르스는 이들 두 사람을 소개하며 흥미로운 비유를 한다. 그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분을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보고 두 사람이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결국 동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다보니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어떤 하나의 목표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두 사람이 뚫는 터널이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두 사람이 하나의 산을 서로 반대편에서 오르고 있다면 두 사람은 과연 정상에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인간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먼저 벌어진다. 뒤의 '옮긴이의 말'에 잘 정리되어 있지만, 촘스키는 '인간성'이라는 어떠한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또는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방식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주전공인 언어철학의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는 어떠한 문명의 어떠한 어린이라도 언어를 배울 때에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는 도식 체계(schematism)를 가지고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도식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인간성의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푸코에게 인간성의 개념은 미심쩍은 것이다. 푸코에게 인간성은 어떤 시대상과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의 틀이 반영된 인식론적 지표에 불과하다. 즉 인간성은 어떤 하나의 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며, 매우 가변적인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여 말한다면 촘스키는 관념론적 입장에 서 있으며, 푸코는 경험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내 주전공인 교육학 식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촘스키는 객관주의적 입장에 서 있고, 푸코는 구성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입장은 그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충돌되지만, 예를 들어 다음의 부분만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촘스키는 어떤 실체적인 정의에 입각한 긍정적인 미래 사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개혁가나 혁명가는 그 정당성에 입각하여(즉,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정당성에 입각하여) 혁명이나 투쟁을 행한다고 보았다. 반면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은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혁가나 혁명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하여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즉 권력을 잡기 위해 혁명이나 개혁을 행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푸코는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확신이 안 선다"라고까지 말한다. 반면 촘스키는 인간성의 내부에 절대적인 기반이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바탕으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푸코: 하지만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하는 목표가 더 큰 정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현재의 지배 계급을 축출하고 스스로 집권하게 되면 모든 계급의 권력을 억누르려 들 겁니다.
촘스키: 그러니까 미래를 위한 정당화라는 거지요.
푸코: 물론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을 겁니다.
촘스키: 하지만 정당화는 언제나 정의를 내세웁니다. 그렇게 해서 성취된 결과가 정당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어야 정당화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레닌주의자든 누구든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잡을 권리가 있고,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 만약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집권의 결과라면, 그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1장. 인간의 본성_정의와 권력 中 (p.79)

 
   

 

이 부분은 이 토론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극명한 지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숙고해 볼만한 부분이다. 푸코는 프롤레타리아건 부르주아건 간에 계급투쟁은 정의의 문제라기 보다는 권력의 문제를 담고 있다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촘스키는 계급투쟁이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해도, 그것은 정의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으로 주장되어야(즉,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인간성 내부에 있는 정의의 관점과 부합하여야) 정당화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푸코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어떤 계급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한 계급의 지배가 되고, 각 개인이 그것에 영속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의 관점에서는 계급투쟁이란 감시의 주체가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목자권력이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5장과 6장을 보면). 반면 촘스키의 입장에서는 어떤 계급투쟁이 진정한 정의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그 계급투쟁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집권은 긍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정의란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라고 말해지는 것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칠게라도 다음의 몇 가지를 이에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진보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기 때문인가. 혹은 그것이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 혹은 좋은 사회를 말할 때의 그 좋은 사회란 어떠한 형태의 사회인가. 그 집권한 세력이 내가 원하는 사회와 다른 모습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푸코 식대로 좋은 사회란 것은 어떤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어떠한 지배 세력이든 감시와 국가이성을 가지고 개인을 옭아맬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을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 <진보집권플랜> - 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보가 집권을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함인가. 우리는 그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진보의 집권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모습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푸코가 암시하는 대로 진보의 집권이란 환상에 불과한가. 혹 그것이 환상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너무 1장의 두 사람의 TV토론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다른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2장은 촘스키의 정치적 견해를 중심으로 촘스키와 프랑스 언어학자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이루어지는데, 촘스키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비판을 허용하지만, 경제적 모순에 대해서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이중적 모습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장에서는 촘스키와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계속 이어지는데 촘스키의 언어철학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1장에서 이루어졌던 푸코와의 대담을 요약하여 촘스키 자신이 정리하고 있다. 4장은 1976년 이탈리아에서 폰타나와 파스퀴노에 의해 이루어진 푸코의 대담이며, 담론의 지배(담론에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 감시와 억압 등의 푸코의 개념들을 푸코 자신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푸코는 자기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를 의미하는 국지적 지식인과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의미를 담지하는 저술가로서의 보편적 지식인을 구별하며, 진리와 관련된 이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5장은 1978년 푸코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으로 그는 이 강연에서 원시 기독교가 목자(牧者)권력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 기원 및 방식과 이러한 목자권력이 그리스 사상과 이질적인 것임을 밝히며, 이러한 목자권력 체제가 현재의 국가이성과 단속 이론(경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6장은 푸코의 간단한 성명으로 이 성명에서 그는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권리, 그리고 그러한 권리에 기반한 개인들의 연대를 주창한다.

다른 부분들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의 실마리를 조금은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촘스키의 여러 저술들을 보면서 그의 언어철학에 대한 생각들과 정치에 대한 발언들이 어떻게 연관될까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가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바탕 생각들이 그의 언어학이나 정치적 저술 모두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언어학 역시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촘스키와 푸코의 사상에 담긴 기본의 밑받침을 살펴볼 수 있는 대략적인 개론서의 역할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편으로 이 두 사람의 사상이 충돌하는 지점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도둑 2011-01-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제목이 좋은데요. 서로 반대편 쪽에서 터널을 뚫고 오다가 언젠가는 서로 만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긴 하지만 맥거핀 님이 말한 산 정상에서는 여차하면 서로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여하튼 그들은 만날 것이라 봅니다. 만난 지점에서 무척이나 놀라겠죠? 와~ 당신과 내가 생각하는것이 놀랍게도 맞닿아 있었다니?... 저도 이번에 받은 책들이 다 흥미로웠습니다..^^

맥거핀 2011-01-25 23:16   좋아요 0 | URL
읽기 전에는 두 사람의 사상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서는 생각보다 두 사람의 간극이 꽤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왠지 TV토론에서는 푸코가 그걸 알아차리고(?) 별로 말을 많이 안하는 듯한 인상도 있구요. (물론 제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조금 더 불꽃튀는 토론을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저는 이 책은 괜찮은데, <진보집권플랜>은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어요. 뭐가 나를 불편하게 할까..생각하는 중입니다.^^

네오 2011-02-0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책을 지금에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감시와 처벌을여ㅎㅎ, 촘스키는 상당히 좋아하는 분인데,,푸코와 다르다니 ㅋㅋ, 아 미셀공드리가 노엄촘스키 다큐멘타리를 만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번 영화 좋지 않다고 계속 떠들던데요,,주위에서요 ㅎㅎ

맥거핀 2011-02-02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푸코 책은 대학 때 (어쩔 수 없이) 조금 읽은 게 다입니다. 항상 뭔가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여의치 않네요. 어렵다고 느껴지는 책은 점점 피하게 되고 말이죠. 그러면 안되는데.
음..맞아요. <그린호넷>평이 꽤 별로더군요. 저는 사실 공드리 영화는 좀..<수면의 과학>도 좋다는 평들이 조금 있었는데, 저는 별로였어요. 촘스키 다큐멘터리도 찍나요. 공드리하고 촘스키는 좀 안어울리는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