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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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의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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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9-2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에서 옛날에 여자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보니 남자들이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느꼈을지 못 느꼈을지 모르겠군요 아주 모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일이 소설에만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요 그리고 없다고 하는 말을 볼 때는 어떤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예요 바로 떠오른 건 아니고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생각해내고 ‘이 소설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네’ 했습니다 다른 건 생각 안 나고 제목만 생각났습니다 단편집입니다 그걸 봤는지 안 봤는지... 봤지만 잊어버렸겠지요

어쩐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말하는 것처럼도 보이는군요 꼭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애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 마음...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군요 자기 마음을 다 드러내고 살기는 어렵겠죠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거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하는 저는 그러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 이 가운데서 장편으로 나오는 것도 있을지 모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건강하게 지내고 앞으로도 소설을 쓰면 좋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4-09-24 12:14   좋아요 0 | URL
아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는 저도 가지고 있는 단편집입니다...라고 쓰고 찾아보니 없군요. 아무래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았던 듯 싶습니다. 무슨 물고기에 대한 얘기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저는 하루키 책들을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도서관에는 하루키 소설들은 거의 책들이 검정색 하드커버로 다시 제본이 되어 있어요. 하도 많이들 빌려가서 책표지가 너덜너덜해진 탓이지요. 그래서 늘 그 원래 표지가 어떤건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그 표지를 찾아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군요(솔직히 너무 촌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표지들도 최근에 보니 또 바뀌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단편집들도 새로 출간된 것들이 많더군요.

제가 (꼭 하루키 아니더라도)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까닭도 있습니다만, 하루키 소설들은 아무래도 단편이 더 좋아요. 안 끝날 것 같은데, 툭 끝내버리는 그 심플함이 하루키 단편들의 매력입니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들은 궁상맞게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왠지 재즈 음악을 틀고 맛있는 수입맥주(되도록 이름이 어려운걸로)라도 하나 들고 봐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2014-09-30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11-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알기론) 하루키 팬들중 거의 유일하게(아니 드물게), 에세이,단편 다 때려치우고 하루키 장편 좋아하는 신기한(아니 독특한) 팬입니다.. 저는 그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요. 단편은 제가 원래부터 장르 자체를 싫어하니 그런 듯한데 좋아할 거예요, 장르 편식 안하고, 좋아하려고 하는데, .... (툭 끝난 댓글)

맥거핀 2014-11-18 20:33   좋아요 0 | URL
하..그쵸. 하루키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편이나 에세이를 많이 이야기하는데..드문 팬이군요. 저는 솔직히 하루키의 작가인생 초반의 장편들은 그닥, 이었는데(특히 `세계의 끝과...` 이거는 읽기가 힘들더군요.) 최근에 나온 장편들은 좋더군요.

저는 하루키 말고도 대체로 단편들을 더 좋아해요. 아무래도 읽는 끈기가 별로 없어서 그런 모양. 최근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세계문학 단편집` 세트를 샀는데, 그건 언제 읽게 될지...
 

 

 

(<명량>, <타짜 - 신의 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명량, 김한민, 2014

 

모르면 호로자식이제. 1700만이 넘게 든, 지금도 어딘가에서 흥행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김한민의 <명량>에서 (의도치 않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다. 왜병들에 맞서 나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노력을 모르는 후세인은 호로자식이라는 영화 속의 이 말이 그 이후에 여러 글에서 많이 인용된 것은 물론 이유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다른 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 혹은 훈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인터랙티브. 그것은 영화 안의 인물이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이상한 동질감으로 묶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이 영화를 보러 온 우리는 적어도 호로자식은 아닌거야. 그 기이함이 내포하는 어떤 함의들은 다른 글들에서도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길게 할 말은 없지만, 다만 나는 왜 여러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호로자식'이 쓰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는 어떤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호로자식(혹은 후레자식)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호로'를 오랑캐를 뜻하는 호노(胡奴) 혹은 호로(胡虜)로 보는 것, 혹은 '홀의'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즉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오랑캐 노비(포로)의 자식이거나, 혹은 '홀의 자식'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 홀로 키운 자식이라는 해석이다(사실 이 어원설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다만 여러 견해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를 추가하여 말하자면 전자의 견해로 본다면 사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이 어원설과 연관된 부분에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돌아온 여자들('환향녀(화냥년)')이 낳은 자식이 '호로자식'이라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사실 이 영화 <명량>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랑캐이든 혹은 홀의 자식이든 간에 이 두 가지의 설명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있다. 즉 이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결국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이 여기에 은밀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결국 원했던 것은 어떤 '교육용 비디오'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교육공학적으로 볼 때 교육용 비디오가 가져야 할 지향점은 명백하다(여기에 전공을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언급되는 지침들이 있다. 초기의 흥미유발과 긴장감 유발이 되어야 하며, 극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적절한 장면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야 하며, 매 장면의 도입에서 특정의 사인이 필요하다. 반복, 재예시, 비교/대조 등의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다. 스타일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명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정리, 요약, 일반화 등을 통하여 무엇을 다루었는가를 알려주도록 한다 등등. 이런 지침들은 일반 영화와도 연관되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즉 다시 말해서 사실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지침들은 필요가 없다. 초기의 흥미나 긴장감 유발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도 많고, 스타일의 일관성이나 명료함은 도리어 일반 영화들에서는 독이 되는 면도 있다. 재정리나 요약 등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영화의 완성도를 망가뜨린다. 즉 '교육용 비디오'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좋은 비디오(영화)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 교육용 비디오의 지침들을 충실하게 따른다. 불가능한 싸움을 시도하는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유발되며,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왜의 진영과 우리의 진영은 이상한 대구를 이룬다(즉 분열된 인물들 속에서 이순신 장군만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인물들은 전형적이며 대체로 그들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다. 샷의 구성은 거의 관습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친절한 반복 설명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친절한 요약정리와 부연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명량>은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살은 거의 교육용 비디오와 동일하다. 물론 어떤 영화들(사실 거의 모든 영화들)은 특정의 메시지를 담는다. 때로는 우리는 그것을 '교훈'이라고 약간은 비꼬는 의미를 담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영화들에서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메시지가 적절하게 감추어져 있거나 교묘한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다. 아니 그 노골적인 메시지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지는 전략이다.

 

그것이 노골적이지만 거부감을 중화시키면서 1700만이라는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이념과 사상에도 벗어나 있는 말 그대로 국민적인 영웅이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구성의 독특함이 아니고 모두 아는 이야기를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우리는 누가 이겼나를 궁금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승리가 얼마나 멋진 것이었나, 그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관습적인 구도와 관습적인 샷이 필요했다. 새로운 구성과 새로운 샷은 관객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고, 기존의 것들을 보다 크게, 보다 세게, 보다 웅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감독은 판단했을 것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이다.

 

<명량>의 전반부는 지루하고 조금은 따분해보였지만, 후반부 해전 씬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영화는 활력을 되찾는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결국 해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음의 해전의 준비나 우리 진영의 대립 같은 부분은 보다 사실에 가까운 부분, 혹은 사실에 기반한 고증들이 필요한 부분이고, 나중의 해전은 보다 허구에 가까운 부분, 혹은 상상의 나래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해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가능한 승리를 알고, 약간의 전술에 대해 들어서 알지만, 사실 세부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 <명량>은 그 해전의 시시각각의 흐름을 마치 우리가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해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명량>은 고증할 수 있는 부분은 부실한 묘사를 하거나 어물쩡하게 넘어가거나, 왜곡된 묘사를 하고, 고증할 수 없는 부분은 공들여서 마치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묘사한다(나는 단순히 어떤 그 해전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만을 놓고 봐서도 불가능한 승리였음이 사실이므로, 그 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해보이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씨 여인(이정현)이 치마를 벗어서 흔드는 장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그런 것이 실제로 있었지 말란 법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에는 지루해하고, 나는 결국 알 수 없는 것만을 즐겁게 보았다. 혹은 이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타짜 - 신의 손, 강형철, 2014

 

영화를 같이 보고 나온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아니 뭐 도박을 벗어난다고 하더니, 결국 도박으로 복수하고, 도박으로 행복해지는구만. 나는 사실 그것이 '타짜'라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를 뭉뚱그려서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타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있다. 도박을 끊어라, 도박을 끊어야 행복해진다. 그러나 영화 속 어떤 인물들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이 메시지에 따른다면 영화(혹은 만화)가 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 끊고 성실하게 벌어서 성실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영화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메시지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지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밀하게 암시될 뿐이며, 그것은 결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니(조승우)가 나온 1편의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어물쩡 넘어가는 느낌이 있으며, 대길(최승현)이 나온 2편의 결말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내가 느낀 차이가 있다면 2편은 보다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1편은 흐릿하고 모호하게 처리했지만, 2편은 이것을 마치 해피엔딩처럼(혹은 눈밭의 광땡처럼) 찍었다. 글쎄, 영화를 본 분이 있다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돈 때문에 그들은 해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감독의 전작 <써니>를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써니>도 이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해피엔딩이 아닌데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감독 강형철은 두 번 모두 그것을 행복한 무엇으로 보이게 했으며, 그 무엇에는 어쩌면 구린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린내 나는 무엇 중의 하나는 단적으로 '돈'과 같은 것, 혹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이 스승이고, 돈이 무엇이라도 규정한다는 영화 속 타짜들의 말은 단지 타짜들의 말일 뿐인가, 아니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함의인가.

 

이 영화의 샷들은 <명량>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부터 중반까지 영화는 계속 화려한 잔재주들을 구사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있지만, 샷의 어떤 속도감과 재기발랄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지치지 않고 이어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은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되는데, 영화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화투판에서 어떤 잔재주들, 예를 들어 패를 돌린다거나, 패를 화려하게 섞는다거나 하는 등의 손기술들은 다른 무엇을 숨기거나 무엇을 바꾸기 위함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가 팬티를 슬쩍 보여줄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시선이 그 쪽으로 돌아간 자들은 반드시 어떤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계속 잔재주들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그리고 그 잔재주들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무엇으로 돌리고자 함인 것 같다. 그 우리의 시선 이면에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치른 것은 무엇일까.
 
즉 잔재주들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잔재주들이 과해지면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그 잔재주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패착일까. 혹은 도리어 영화의 노림수일까(이것은 어쩌면 대길의 전략과 비슷한 것일까. 마지막 대길의 전략은 잔재주를 일부러 내보이는 것이다. 즉 그 잔재주를 일부러 잡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전제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다른 잔재주가 없어야 한다. 즉 그 이면은 깨끗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깨끗했던가. 그것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노림수라고 해도 여전히 뭔가 꺼림칙함이 남는 것은 이 영화는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혹은 그것을 말한다고 내세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는 데에는 결국 아무런 기술이 없다, 그것에는 예를 들어 대길의 진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 이 영화는 그 속에 다른 기술을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이 점철된 잔재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 <써니>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즐겁게 보았지만, 이 즐거움 속에 어딘지 모르게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남는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수술당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 화려한 손기술들, 혹은 화려한 샷들에 취해 있는 사이에 말이다. 당신의 셔츠를 슬그머니 올려보라. 어쩌면 무엇인가 수술 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

 

아무튼 두 영화는 흥행했거나, 흥행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에 대해서, 혹은 영웅을 갈망하는 사회에 대해서, 심지어는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잘 모르는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박근혜 지지자가 아닌데도 그 영화 <명량>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이라는 사실이며 그 노골적인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골적인 교육용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영화. 아니면 그 반대. 노골적인 상업적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교육적인 영화(이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최근에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우려되는 것 중의 하나는 위의 영화들 외에도 점점 노골적인 영화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점점 노골적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그 노골성이 성공을 거둘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영화는 점점 프로파간다와 경계가 흐려지고, 그것은 단지 영화만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수록 점점 그들을 구별해 내지 못하며, 그 어딘가에서 "나를 가르치려 들지마라!"고 외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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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9-18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한테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것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에도 관심을 갖겠죠 이 영화 교육용으로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때... 어물쩡 넘어간 것은 영화 밖에서 제대로 배우기를 바란 건지도 모르죠 관심이 죽 이어지면 좋을 텐데...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잘 모르는군요 오래전에 조금 배운 것만 알고 있어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도박을 끊으면 좋겠죠 하지만 영화에서 그러면 재미없죠 저는 이런 생각을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소설(그런 소설만은 아니군요 다른 소설도 다 그렇게 생각해요)을 보면서 합니다 소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고... 잔재주에 마음을 쓰고 있을 때 무엇인가를 잃을 수도 있다니, 조금 무섭기도 하네요 정신을 차리고 봐야 할지, 그것을 즐기면서 봐야 할지...

영화에 감독 자신이 넣고 싶은 것을 넣기도 하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넣는 일도 있지 않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4-09-18 11:36   좋아요 0 | URL
제가 더 '명량'이라는 영화에 실망한 이유는 아마도 감독의 전작을 좋게 본 탓일 겁니다. 표절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뭐 저는 나름대로 괜찮게 봤었거든요. 원래 잘 못하는 사람이 그러면 그러려니 하지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실망이 더 큰 법이죠.

아무튼 노골적으로 한다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죠. 위에 두 감독들이 몰라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그거는 결국 제 살 깎아먹기라고 봐요. 거기에 관객이 길들여지면, 그 이후에는 더 노골적이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겠죠.

저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 없고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점들을 더 이야기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생각보다도 좋지 않아서 실망했을 뿐입니다. 교육용 비디오 이상의 예술품을 기대했던 것은 제 기대감이 너무 큰 탓이겠지요.

희선님은 도박 같은 것은 전혀 안 하실 것 같기에...저는 뭐 도박까지는 아니고 맞고 정도는 가끔 칠 때도 있는데.

2014-09-22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4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4-09-1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라는 장르는 기수(이성)를 움직이기보다 코끼리(감성)를 움직이므로,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는 것이 가능하고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라는 질문이 필요없지 않을까요.

맥거핀 2014-09-18 11:56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제가 댓글을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영화는 감성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위 질문들은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그 두 부분이 어떻게 연결을 시키면 될까요?

마립간 2014-09-20 11:39   좋아요 0 | URL
반론이기보다는 ... `명량`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제 주위 평은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타자, 신의 손`는 줄거리만으로도 맥거핀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제 댓글은,
영화가 감성만을 다루는 것보다 감성을 주로 다룬다. 질문이 필요 없다기보다 `몸`이 먼저 알아야 한다. - 이런 의미입니다.

맥거핀 2014-09-19 15:38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네..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영화의 감상, 혹은 해석에 있어서 감성의 문제가 당연히 우선이 되겠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감성은 다루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므로) 비평 같은 부분에서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죠.

아..그리고 태클은 아니고요. `신의 한수`가 아니라 `타짜-신의 손`입니다. `신의 한수`라는 영화는 따로 있기에..혹시 댓글을 읽으시는 다른 분이 오해를 하실까봐.^^

마립간 2014-09-20 11:39   좋아요 0 | URL
오타 수정합니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극장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감상.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맷 리브스, 2014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시저가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지 않다, 그러니까 결국 유인원과 인간은 다를 바가 없다고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장면이야말로 유인원이 일종의 '여명'의 시기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반격의 서막'이지만, 사실 영화의 원제에는 '반격'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구도를 만들고 싶은 수입사의 멋대로 제목일 뿐이고, 원래 제목은 간략하게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즉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유인원들은 예전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고, 그것은 결코 현재의 인간들조차도 이룩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것은 우리(유인원 혹은 인간)가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유인원은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집단은 결국 상대방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타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종족들은 거의 대체로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섰다).

그것은 이 유인원이라는 집단의 내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유인원은 그저 유인원이면 되었다. 즉 리더 시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유인원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보다 유인원이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그저 무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은 유인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면 되었고, 그 받아들여지는 유인원은 오로지 한 가지의 대원칙, 즉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여서는 안된다'의 테두리 안에만 들어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시저가 많은 희생을 얻고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인식은 사실 유인원의 본성도 그런 것만은 아니며, 유인원도 결국 탐욕스러운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유인원이라는 무리는 그저 '유인원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인원을 유인원이도록 하는 다른 무엇인가(단순히 서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넘어서는)를 갖추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즉 시저가 코바에게 내린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정언명제 이후에는 유인원은 유인원이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 일종의 법과 질서의 단계(유인원이 유인원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로 이 무리가 진화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저가 코바에게 선언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붙잡는 장면을 연상시켰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시저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예상을 뒤엎는 선언이라니. 이 장면에서 리더의 조건이라든가, 결단력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배트맨이라면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배트맨은 그렇게 선언하지 못해 끝끝내 조커에게 조롱당했지만..) 

그러므로 시저라는 위대한 영웅은 사라져가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인간들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법과 질서라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그야말로 '새벽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된다. 도리어 걱정되는 것은 영화 속의, 혹은 영화 밖의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위대한(사실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리더의 영도에 따라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자꾸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로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어떤가. 시작하면 우리도 결국은 많은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끝끝내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던 시저의 고뇌가 요즘에는 현실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큰 전쟁에서든 작은 전쟁에서든.

 

 


군도: 민란의 시대, 윤종빈, 2014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다른 영웅을 보여주는 것처럼 밑밥을 깔았다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욕을 먹고 있는 영화가 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영화 <군도>는 초반에는 웨스턴의 형식을 빌려 일종의 영웅설화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처음 돌무치(하정우)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웨스턴과 영웅설화의 이상한 조합이다. 돌무치는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비범하게 태어났고(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일반적인 마을 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마을 외부 허허벌판 속에 있는 돌무치의 집).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어려서 고난을 받고(그는 18살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물론 이는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 돌무치는 이를 계기로 '추설'이라는 군도(群盜)의 간택을 받고, 이제 그 무리 속에서 성장하며, 그 영웅성을 극대화시켜 복수를 성공시킬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비트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돌무치의 영웅적인 성장과 그의 호쾌한 복수를 보여주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영화는 돌연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를 돌무치만큼 공들여 묘사하더니 그에게 절대힘, 그러니까 아무도, 심지어는 돌무치도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다. 이는 사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악역은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시킬 정도로 강력해야 하기는 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주인공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히 모를 리 없는 미친 영화감독 윤종빈은 조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질적인 나레이션을 붙임으로써 그의 존재를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가 미쳤다고 보는 관점은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만드려는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영웅담으로 보며, 왜 영웅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비난은 오로지 애타게 영웅을 바라는 우리들의 의지가 빚어낸 오해는 아닐까. 왜냐하면 이 이상한 영웅담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영웅의 각성과 그의 성장이 전적으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돌무치는 추설의 무리가 된 이후에도 그다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사실 백성을 살린다,라는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여전히 더 크게 위치해 있으며, 그는 여전히 어리석고 별로 생각이 없어 보이며, 결국 조윤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윤을 이기는 몫은 감독 윤종빈이 그에게 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를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름모를 한 무리의 백성들이며, 영화의 제목은 '군도: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군도: 민란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종빈은 몇 가지 설정들(예를 들어 타이틀롤)이나 음악들로 분명 어떤 착각을 준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찍고자 하는 것은 영웅설화나 웨스턴이 아니었다. 보통의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일반 민중들은 그저 고통과 압제에서 신음하다가 영웅의 등장으로 구원받는 시혜의 대상이거나 혹은 영웅의 활약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게 그렇게 되면 영화는 '군도: 영웅의 시대'가 되기 때문이다. 윤종빈은 선택을 해야했고, 그 선택은 결국 돌무치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고, 결국 민란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란은 결국 시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조윤에 대한 1차 습격이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그들의 이제까지의 습격이 일종의 시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추설이라는 조직은 그 이전까지 백성들과 거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아지트는 아무도 모르는 산속 깊은 곳에 있고, 그들의 조직은 아무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조직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고, 그들은 영웅으로서 백성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일종의 혜택을 줄 뿐이다(이런 이들의 일종의 시혜 의식은 그들의 회의 시간에도 잘 드러난다). 그런 그들이 조윤에 대한 재습격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런 참여의 결과, 즉 진정한 민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물론 이는 그들이 대폭 수가 줄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일종의 개방적인 조직으로 추설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도인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구경꾼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윤이 백성들과 대치한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자는 나오라는 조윤의 외침은 백성들을 향한 외침이면서 결국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윤이야말로 결국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자이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것이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윤은 실제의 조선시대의 많은 실제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재물로 방향을 돌린 '땅귀신' 중의 하나였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그가 땅문서를 모아 가장 처음 한 일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된 인정투쟁으로 보아도 될 것인데, 이의 기저에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들어가 있다. 즉 그는 그 자신의 물음처럼 연꽃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돌무치와 함께 창을 들고 따라 나선 민중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 스스로 신분제라는 신의 뜻을 벗어나려 하였으며, 이는 탐관오리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추설의 무리에서 자라난 아이에게도 역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이 역시도 연꽃의 의지인 것이다.


덧.
그래서 어떻게든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의지는 잘 알겠지만, 이 영화 <군도>를 <명량>과 엮어서 <명량>에는 리더가 있지만, <군도>에는 리더가 없고, <명량>의 영웅담은 잘 짜여져 있지만, <군도>의 영웅담은 약하다느니 하는 비교는 조금은 부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도>는 사실 영웅담을 만들 의지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영웅적 배경을 초반에 깔아야 했지만, 사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반면 <명량>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고, 그저 그의 며칠을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영웅인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테니. 아무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이 이상 할 말은 없다). 즉 어떤 사람들은 영웅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영웅을 결국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에 그러니까 영웅이 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물론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도>보다 <명량>이 흥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그것은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도 조금은 연관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흥행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명량>을 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코멘트가 아니다).

얘기한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위의 두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나 <군도: 민란의 시대>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있으며, 그 캐릭터들을 모두 잡고 가려는 노력이 인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군도>는 윤종빈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듯이 캐릭터들의 열전이며, 그것은 특히 악역 조윤에서 빛을 발한다. 도리어 욕을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왜 악역이 (주인공보다도 더) 빛을 발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조커의 영화라고 해서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즘의 누군가들은 악이 그저 맥락없는 악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 연관되는 것 같다(다만 선한 우리가 그 '맥락없는 악'보다 나을 수 있는 점을 한 가지라도 찾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어떤 맥락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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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2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2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8-1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인원이 말도 타고 다니는군요 저런 모습을 보고 저 유인원은 말을 했을까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저 안에 들어간 건지, 컴퓨터 그래픽인지 하는 생각도... 그런데 컴퓨터 그래픽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사람이 하는 것만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해도 엉성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꽤 좋아졌잖아요 우월하다고 느껴서 나빠지는 건 종족에 한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개인이 그런 생각을 해도 나중에 안 좋아지겠죠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닌 것을 알면 깜짝 놀라기도 하죠(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밖에 없겠군요 다른 동, 식물은 그런 생각 하지 않죠)

악역이 처음에는 의적 같은 건가 했는데 그것은 아니군요 진짜 나쁜 사람이군요 백성과 싸우는 걸 보니... 영웅 한 사람이 이루어주는 게 아니고 백성이 이루어내는 거라면 거기에 책임을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이 해주었을 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냥 살고 싶었는데 왜 그런 일을 해서... 하면서 그때는 원망하잖아요 백성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서 얻으면 그런 일은 없을 듯합니다(잠깐 괜히 했어 하는 생각은 할지도...) 어떤 일을 했을 때 그때는 좋아도 시간이 흐르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나잖아요 일을 이뤄냈다고 해서 그게 끝난 건 아니죠

이런 말을 하니 두 영화 비슷한 면이 있군요 법과 질서가 필요하겠다는...


희선

2014-08-15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1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속죄(贖罪), 구로사와 기요시, 2012

 

 

(작품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를 보다 보면 뇌리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소녀들, 그리고 음산한 남자의 등장과 부탁, 그리고 그것에 응하는 에미리, 소녀들을 등지고 떠나는 에미리와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후 다시 만난 네 소녀들과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 코이즈미 쿄코), 그리고 살아남은 네 소녀들에게 가해지는 속죄의 강요. 물론 이것이 뇌리에 남는 이유는 일련의 이 장면들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며, 작품 속에서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를 포함한 이 다섯 여자들의 이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장면들인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기도 하며 일련의 질문들 -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남자가 데려간 학교 체육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소녀들은 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 속죄의 강요는 정당한가, 등등 - 을 생각케 하는 장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이 장면들이 계속 반복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드라마의 구성으로는 약간 특이하게도 이 일련의 시퀀스는 일종의 액자로서 매회 반복이 된다. 물론 그것에도 이유는 있을 터였다. 그것은 개개의 소녀들이 주인공이 되어 매회를 이끌어 간다는 이 드라마의 구조(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도 이 드라마처럼 화자가 바뀌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조라고 알고 있다)에서 연유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니 주의 깊게 보라는 신호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반복은 이상한 다른 잔상들을 남긴다. (한 마디 더 붙여두자면 후에 이 드라마는 영화판으로 재편집되기도 했는데,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드라마와 비슷하게 중간중간 계속 반복된다. 전편의 이야기를 리마인드 시키는 것이 중요한 드라마라면 이러한 반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을 이유란 무엇일까. 또 한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장면들을 반복시키기는 하지만 미묘한 변주로 중간중간 다른 느낌을 주며, 각각의 주인공들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마지막에 반복되는 속죄 강요 씬은 아사코가 말하기 직전 그녀가 묶고 있던 머리를 푸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그녀에게 효과적으로 주목하게 만든다. 즉 지금까지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듣고 있던 네 소녀들의 심정만을 생각해 왔다면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를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이 남기는 잔상 중에 하나는 바로 반복한다는 것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반복되는 이 '장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반복한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반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개별적인 장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이 반복되는 시퀀스 중 남자가 에미리를 데려가는 것을 소녀들이 뒤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래전 아사코(에미리의 어머니)가 벌인 일들의 반복이며, 동시에 이후에 변형된 형태로서 다시 아사코에 의해 반복 시도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아사코가 과거에 한 것은 자살의 방조이지만 소녀들의 행위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남자가 에미리를 데리고 갈 때 소녀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을 보는 우리 역시 대개 짐작한다. 에미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말이다. 그것을 구로사와 기요시는 효과적인 컨트롤로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남자와 에미리가 학교 건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잡은 소녀들의 시점숏 옆에 매회 贖罪라는 제목을 띄우는 것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러한 작은 부분들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약간은 변형된 형태로 반복되는데, 예를 들어 5편에서 아사코가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다는 진술은 1편의 사에(아오이 유우)의 이야기로 변주되며, 질투와 시기의 고백은 2편 마키(코이케 에이코)나 4편 유카(이케와키 치즈루)의 이야기에서, 누군가가 가진 중요한 것을 빼앗는 것이 복수라는 5편의 이야기는 다시 4편 유카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 상으로 볼 때 아사코가 벌인 일련의 일들은 에미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거쳐 기묘하게도 살아 남은 네 소녀들에 의해 일정부분 반복되며 이는 이 아사코가 소녀들에게 강요한, 그리고 소녀들이 수행하려고 애썼던 속죄(贖罪)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속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속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속죄'라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는 도리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에나 마키, 아키코에 의해 수행된 속죄는 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그 자신의 삶만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속죄라고 보기는 힘들고,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준 유카는 사실상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속죄가 아니다(그것을 마지막 "행복하게 살라"는 아사코의 대사로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아사코의 속죄 시도 역시 경찰에 의해 실패한다. 즉 이 영화의 모든 속죄는 사실상 실패한다. 아마도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결국 이 소녀들이 속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묘한 것은(그리고 이 이야기가 흥미를 주는 것은) 이들이 저지른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고 그것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이 저지른 '갚아야 하는 죄'라는 것은 뭘까.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 두려움에 나서지 못한 것? 혹은 에미리를 죽게 내버려 둔 것? 아니면 그의 근원에 있는 에미리에 대한 질투? 아니면 그 총체로서의 무엇? (이것이 어쩌면 이런 이야기에서 보는 이에게 흥미를 가지게 하는 기이한 점이다.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의 기묘한 변주. 사실 '속죄'를 하겠다고 나선 금자씨의 죄도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사실 이상하게도 속죄는 늘 그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속죄라는 것이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결과물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속죄라는 것이 결국 반복이기 때문에, 즉 그 반복이 어떤 잔여물을 계속 남기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속죄'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금 기묘한 것이 사전을 찾아보면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이라고 되어 있다(그래서 이 속죄할 속(贖)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건을 의미하는 조개 패(貝)를 변으로 쓰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속죄는 결국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죄에 비길 만한 다른 어떤 것(공로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는 있던 죄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필연적으로 이 과정은 그 수행 과정에 있어서 다른 잔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 잔여물의 크기는 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커진다. 즉 속죄는 종종 복수와 비슷한 것이 되어간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것처럼,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는 다른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를 낳는다. 그것을 이 일련의 반복들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의 사건은 15년 전의 에미리의 죽음을 불러왔고, 에미리의 죽음은 다시 현재의 사건들로 돌아왔다. 일련의 시퀀스는 반복되고, 이야기는 반복되며, 속죄는 다시 속죄로 돌아온다(즉 이 이야기 이후에 거의 모든 인물들은 다른 속죄를 행해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시퀀스들은 이 속죄의 불가능성에 대해, 그 필연적인 반복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닐까. 완전히 끝으로서의 속죄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는 여전히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있으며 인간들은 계속 무엇인가를 반복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늘 그런 것에 능했다. 일련의 공포물로 유명해진 감독이지만, 사실 그의 공포는 귀신이나 혼령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달라붙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미스터리라 부른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공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의 공포물은 사회 속에서 이 사회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리려 노력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공포의 원형,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에 있는 원죄와 같은 것(꼭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아니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 <속죄>에서의 색감은 보통의 구성과 반대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과거의 회상 장면의 색감을 빼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과거 15년 에미리의 사건이 벌어질 때는 강한 색감이지만, 현재에는 도리어 물감이 빠진 듯한 화면이다. 아니 그것은 무엇인가가 빠졌다기 보다는 그 총천연색의 화면에 무엇인가가 달라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속죄'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반복이다. 완전한 속죄를 꿈꾸는 순간, 속죄는 늘 실패한다. 적어도 인간이 행하는 속죄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여전히 그렇게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은 늘 그것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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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7-23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볼 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정말 속죄해야 하는 사람은 에미리 엄마구나 했습니다(이상하게 책에서는 에미리 엄마 이야기를 못 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고 생각했는데 봤더군요 예전에 책 보고 써둔 것을 보니 그 말 짧게 썼더군요 그 말 봤는데 에미리 엄마도 속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에미리가 남자한테 죽임 당한 책임을 아이들한테 물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같이 있었는데 그렇게 됐다고 해서... 부모라면 아이들이 같이 있었는데도 그 일을 막지 못했느냐는 원망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네 아이 다 남자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고... 실제 그런 일이 있다면 괴로울 듯하네요 저는 그 사람(에미리 엄마)이 되어서 생각하지 못하고 아이들 쪽을 먼저 생각했군요

같은 장면인데 조금씩 다르다니, 그런 것을 잘 보시는군요 책으로 볼 때는 아이들 쪽에서만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는 에미리 엄마 쪽에서 생각하도록 해주는군요 그래도 에미리 엄마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죄는 죽음으로 아니면 자기 삶을 버리는 걸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할 일을 하지 않기... 작은 잘못은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잘못도 쌓이면 커질지도 모르겠군요 속죄는 할 수 없다, 아마 그렇겠죠 죄는 사라지지 않는 거니까요


희선

맥거핀 2014-07-23 11:11   좋아요 0 | URL
책에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는 에미리의 엄마가 상당히 강조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상으로도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일단 등장부터가 뭐랄까...일종의 저승사자 같은 느낌으로 등장한다고 할까요. (저 위에 포스터에서도 메인인 이유가 있겠죠.)

과거의 사건은 제쳐두고 보면 일단 에미리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도 있어요. 아이들이 모두 범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다니..납득하기가 어려웠겠죠. 아무튼 이야기의 포인트 중에 하나는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기억을 안하려고 하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는 거죠. 뭐 그 둘의 복합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에미리가 남자와 같이 걸어가는 장면이나 나중에 아이들이 집단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보면, 뭐랄까..약간 에미리가 죽도록 그들이 내버려뒀다..는 느낌도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속죄를 해야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려운 답이겠습니다만.

아무튼 비극적인 이야기이고, 그것이 일말의 희망도 내비치지 않는 것 같아서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미나토 가나에의 스타일인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희선 2014-07-24 01:42   좋아요 0 | URL
책보다 드라마가 더 어둡게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책 읽은 지 좀 돼서 잊어버렸는데, 시간이 흘러서 뭔가 생각난다고 한 사람이 있거든요 에미리 엄마한테 보낸 편지에 그런 말을 썼던 건지, 다른 사람한테 한 건지... 네 사람이 그 사건 뒤로 한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었으니 충격을 받았을 테죠 그런 일을 겪으면 어떨까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네 사람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 좋은 일 이야기해서 뭐하나 그런...

이것과 비슷한 게 하나 생각나더군요 우리나라에 책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거기에서도 엄마 때문에 일이 일어난 거나 마찬가지인데... 중학교 수학여행 때 한 아이가 혼자 버스에서 내렸어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그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몰랐습니다 중학생이니까 길을 잃어도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서 집에 찾아올 수 있을 텐데, 그 아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무해가 흘렀습니다 그때 친했던 아이들 모두 사라진 아이한테서 문자를 받아요 스무해가 흘러서 수학여행 때 사라진 친구를 찾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 아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를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별로 비슷해 보이지 않을지도... 수학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않은 아이 엄마가 아이들을 원망하거든요 그게 비슷해 보이는 거군요 어떻게 한 사람도 그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모를 수 있느냐, 그런... 그 아이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친구도 있는데,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 했는데... 다른 것은 말할 수 없군요 말해도 괜찮을 테지만...

제목은 <격류 : 나를 기억하세요>(시바타 요시키)예요 소설은 그냥 격류인데, 드라마에서는 ‘나를 기억하세요’를 붙였군요 그냥 생각나서요(~나를 기억하고 있습니까~로 찾아보니 나오는군요 드라마 정보)


어떤 사건을 겪으면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듯합니다 그것을 잊고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책에서는 잘 살아가는 것보다 안 좋게 살아가는 것을 더 많이 보여주더군요 정말 그런 건지... 그러고 보니 미나토 가나에 다른 소설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군요


희선

희선 2014-07-24 03:33   좋아요 0 | URL
갑자기 미나토 가나에 소설로 영화 만든 게 생각났어요 그런데 소설과 좀 다른 것 같네요 소설은 <이십 년 뒤의 숙제>고 영화는 <북쪽의 카나리아들 北のカナリアたち>이에요 <속죄>에서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 여기에서는 보여요 저는 소설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군요 영화도 그럴 것 같아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을 이렇게 말했군요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조금 다르고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4-07-25 11:22   좋아요 0 | URL
네..이 '희망없음'은 미나토 가나에의 영향도 있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에서 어떤 밝음을 찾기란 그다지 쉽지가 않거든요. 심지어는 '밝은 미래'라는 제목을 단 영화에서도 그다지 밝은 이야기란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이야기는 확실히 이 이야기와 조금 비슷한 면이 있네요. 부모로서는 원망스럽기도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지...이 이야기에서 에미리의 엄마도 그렇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놓고 보면 참 이번에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타인에게 공감을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꼭 댓글 같은 것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공감 능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뭐 꼭 작은 학교 안에서가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도 무관심한 죽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고독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 쓸쓸히 외롭게 죽어 가는 것..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요새 돌아가는 일련의 일들이나 사회를 보면,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정부가 기능하는 사회인지, 그리고 이곳을 일종의 '정상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꼭 정부 탓만 할 것도 없구요. 그런 정부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국민들이니..어떤 사회나 결국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통치자를 가지게 되는 거겠죠.

비의딸 2014-07-2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으로 읽었는데요, 왜 하필 에미리냐고 에미리 엄마가 에미리의 죽음을 전하는 딸의 친구를 밀치며 소리치는 장면이 기억나요. 왜 에미리였는지는 네 소녀의 고백을 들으며 이해하게 되죠. 드라마가 있었다니, 그것 5부작이나 되는.. 책은 사실 중편정도 양밖에 되질 않거든요. 맥거핀님이 정리해두신 걸 보니 드라마가 무척 궁금하네요. 음 그런데, 어쩐지 드라마가 더 섬뜩할 것 같네요.

맥거핀 2014-07-25 11:27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상당히 짧은 이야기군요. 그런데 저는 이야기를 보면서 사실 도리어 5부작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안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너무 사건 위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등장인물의 심리를 더 세밀하게 살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그 장면은 드라마에서도 그대로 재현이 되요. 그 말을 들은 소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다른 소녀들보다도 개인적으로는 그 소녀의 어떤 후일의 이야기가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드라마는 섬뜩합니다. 특히 에미리와 남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며 그 옆에 '속죄'라는 타이틀롤이 뜰 때 더 그렇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시절, 역사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해서 수 차례 답사를 따라다녔다. 답사를 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답사, 특히 유적, 유물과 관련한 답사는 사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공부하고 가는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충실한 체험학습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숙취와 희미한 잔상과 줄어든 통장 잔고만 남는 거의 무의미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여느 때도 그렇지만, 이 경우에 특히 진리이고, 충실한 공부를 한 후에 답사를 가게 되면, 그간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한 가지라도 더 보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만큼 더 보게 된다. 그런만큼 여행 관련한 서적을 보게 되면 일반적인 여행기나 여행 가이드북 보다는 답사기에 더 손이 가는 편인데, 그런 답사기의 거의 대표격 책이라 할 수 있는 유홍준의 답사기를 오랜만에 펴들었다.  

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읽다보면 그가 가진 글쓰기의 장점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왜 그의 답사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알게 된다. 그의 글쓰기는 이른바 쉬운 글쓰기의 전형이다. 읽는 이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 이해하기 쉬운 사례의 제시, 적절한 균형 감각, 새로운 것에 대한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지식, 적당한 유머 등이 그의 글쓰기에는 들어 있다. 사실 짧은 잡문이라도 써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쉬운 글쓰기야말로 아무나 하기 어려운 것이고, 술술 읽히는 글이면서도 그 안에 깊이 있는 내용을 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아마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글쓰기이고, 아마도 혜안과 통찰이 필요한 것이리라. 즉 읽는 이들에게 아 그렇구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아 그렇구나!를 해야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답사기들의 매력은 내용들보다도 그의 어떤 글쓰기 스타일, 혹은 형식적인 면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유홍준은 약간의 공백기를 지난 후 새롭게 돌아온 답사기 '일본편'에서도 그의 장기를 여실히 구사하고 있다.

그의 장기란 '답사기'라는 본연과 연관되는 것으로, 독자를 마치 그가 가이드하는 한 답사의 대원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에 능하다. 역사와 관련한 답사를 다녀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답사는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 혹은 그 둘 사이를 연결짓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역사적 유물, 혹은 유적이 어떤 과거의 세계를 거쳐 만들어졌는가, 그것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개입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것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혹은 그의 어떤 부피나 질감이라는 물질성도 답사에서는 중요하다. 즉 과거라는 역사적 세계 외에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고 오랜 시간 후의 '나'라는 존재가 그것을 보고 만지러 왔다는 그 현실을 연결시키는 것이 한편으로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균형을 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그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 답사는 단지 역사책을 보거나, 단지 자연물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홍준은 이 균형잡기, 혹은 연결에 능하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다가 어느 틈에 현실의 에피소드로 슬그머니 들어와 그것을 보고 있는 현실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해준다. 즉 그는 현실에 서서 과거를 본다는 이 답사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충분히 보았으면 너무 그것만 보지 말고 다음의 무엇을 보러 가자고 슬그머니 소매를 잡아 이끈다.  

예를 들어 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에서 그가 말하는 '다음의 무엇' 중의 하나는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은 조금은 전진하는 시각이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무턱대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시각이나 과거의 철저한 반성과 극복만을 주장하는 시각과는 조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확히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어떤 실리적인 시각에 가깝다. 유홍준은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즉 그의 시각에서 보면 삼한과 고조선, 혹은 백제의 도래인들이 일본 고대국가 건국에 (거의 중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부정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수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과 거의 나라를 완전히 빼앗길 뻔한 아픔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그들(이 자체적인 힘으로 발전시킨 문화)을 무시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그가 책에서 말하기도 하지만)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 등에서 나타난 미래지향적인 시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예를 들어 역사책의 삼국시대는 가야와 왜가 포함된 오국시대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등이 그러한데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의 왕을 죽일 정도로 불구대천의 원수에 가까웠지만, 왜는 백제가 멸명한 후 백제부흥군에 2만 7천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 등을 그 예로 든다), 이는 역사를 단지 일본의 입장에서, 혹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교류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며, 일본과 우리 사이에 지금의 현실에서 보다 높은 신뢰가 필요하다는 실리적인 입장과도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이 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은 위험할 수 있으며, 그의 표현대로라면 '쌍방에서 날아오는 독화살'을 맞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서 그의 장기인 적절한 균형감각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일본 속에 남아 있는 도래인들의 흔적을 주로 세밀히 살피면서도 그들이 발전시킨 것은 일본문화이지 한국문화가 아니라고 밝히거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도 단지 그들의 한이나 우수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꽃피운 이마리야키, 아리타야키, 사쓰마야키 등의 일본자기문화의 독자적 발전상이나 그들의 발전을 가능케해준 시스템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또 그것은 이제 폐허가 된 히젠 나고야 성을 살피며, 조선이 결국 임진왜란의 승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7년 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메이지 유신과 그들의 발빠른 개화를 눈여겨 보면서도 그들의 반복되는 '자살 충동'이나 군국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며, 또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반성하고 갖추어야 할 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균형감각 혹은 균형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다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결국 '답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이러한 것들을 돌아보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가 어쩔 수 없이 왜장들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도 단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한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 현재에 서서 과거의 가마들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 가마들에는 단지 당시의 고초와 한을 넘어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으며, 조선 도공들의 오랜 시간의 땀과 노력이 담겨 있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과거의 향수에만 매여 있지 않고 단지 강요에 의해서만이 아닌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려는 열정을 그 곳에 쏟아부었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메이지 시대의 유물들을 보며 조선 개국과정에서의 아쉬움과 일본에 대한 분노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다시 군국주의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을 보는 한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답사는 결국 과거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지 않기 위함이다.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의 것을 보며 그것은 한편으로 현재 혹은 더 나아가 미래를 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것이 답사, 혹은 답사기의 매력이자 즐거움이다.


덧.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내 앞에는 아직도 두 권의 답사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나라나 교토에 대해서는 그 곳에 다녀온 경험도 있으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겠지. 물론 꼭 다녀오지 않아도 반가운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온 가고시마의 경우가 그러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배경이 되는 곳이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인데 아는 곳을 돌아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 화산재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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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1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1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2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7-11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다 본 건 아닌데, 몇 권 봤습니다(얼마나 봤는지 잘 모르고, 잊고 있다가 제주편부터 봤어요) 사실 다른 책(우리나라 문화유산을 말하는 책은 많이 있을 테지만)은 거의 본 적 없습니다 문화유산으로 보는 역사, 라는 생각을 예전에 했는데 역사를 말하는데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때 사람 이야기를 해주기도 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만 보는 게 아니고 지금도 보게 해주는군요

조선시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우리나라에 있을 때보다 잘 살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도공을 낮게 봤잖아요 그게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말도 다르고 낯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을 신으로 모시고 있기도 하죠 일본은 그런 게 많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일

화산재 이야기 본 듯도 합니다 저도 다른 책에 나온 곳이 나왔을 때 어쩐지 반가웠습니다 지금은 좀 잊어버렸지만... 규슈에 있는 가마쿠라가 생각나는군요 역사에서는 <원피스>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좋아져야 할 텐데, 인정할 건 인정하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남은 두 권 재미있게 보세요 나라, 교토 가 보신 적 있군요


희선

맥거핀 2014-07-11 19:34   좋아요 0 | URL
저는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최근에 나온 일본편 빼고는 거의 본 것 같습니다. 몇 권은 집에 있고, 몇 권은 도서관에서 봤던 것 같구요. 아무튼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고, 또 유홍준 선생님 글은 나름의 위트가 있어서 즐겁게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는 늘 다음번에 책에 나온 곳을 꼭 가봐야지,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아..예전에 경주에 한 번 갔을 때는 약간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요. 아는 척 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네..저는 일본 도자기 문화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게 많은 조선도공이 일본도자문화에 영향을 끼친 것을 몰랐습니다. 유홍준 교수님 말씀대로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도 예전부터 일본 막부처럼 도공들에게 조금 더 나은 대접을 하고, 여건을 마련해주었더라면 훨씬 더 융성한 도자기 문화를 지금 갖추게 되었을지도 모르죠. 물론 지금도 훌륭합니다만..

저도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본정부의 우경화나 일본우익들의 행태가 우려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일부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일본을 비하하는 태도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싫어도 어차피 옆나라이고 앞으로도 꾸준히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 그들이 싫더라도 배울 점은 배우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야겠죠.

교토는 저에게 참 좋은 기억만 있는 곳입니다. 가본 곳들도 거의 좋았고, 먹었던 음식들도 대체로 좋았습니다. (철저히 보행자와 탑승자 위주인) 버스 시스템 같은 것도 좋았구요. 가끔 우리나라 버스들을 보면 교토 버스가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