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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들을 열어보기 위해서 먼저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것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유동하는(liquid)' 근대 세계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끊임없이 액체가 흐르는 것처럼 유동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미디어, 유행, 자본, 사조, 국가, 주권, 관계, 회사, 문화 등등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고, 동시에 그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도 당연히 역시 같이 유동하게 된다. 즉 개인들은 변화하고, 변화할 수 밖에 없으며, 전혀 원치 않더라도 변화를 강요당한다. 예를 들어 요즘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유연성(flexible)인데, 이는 유동하는 세계에 맞춰 자신을 유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이 갖춰지지 않았을 경우 개인은 그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흐름에 떠밀려 가라앉는다(고 위협당한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그렇고(생각의 유연성),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그렇다(자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는가). 막연한 얘기 같으니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급격히 녹아들어가는 극 지방의 빙하들을 생각해보라. 예전에는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었던 극 지방의 빙하는 이제 여러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의 집합체로 변모하고 있다. 즉 거대한 바다 위에서 수많은 얼음조각들은 말 그대로 유동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고 있던 북극곰들은 그 빙하들을 넘나드는 능력이라는 예전에 그리 필요하지 않았고, 유용하지도 않았던 능력들을 새롭게 갖추어야만 한다.

물론 이는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최근에 새롭게 재편된 세계이다. 예전의 세계에는 개인이 흘러다니지 않도록 하는 몇 가지의 보호막들(동시에 굴레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부장이 지배하는 가정, 혹은 끈끈한 마을공동체, 혹은 안정적인 고용구조를 갖추는 있는 회사, 거대한 지배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 신의 가호를 받는 종교공동체 등등.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것이 거의 해체되었고, 모든 권위와 그러므로 동시에 그 권위로 지속되던 모든 보호막은 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바우만의 표현대로 국가의 지배권력적으로 말하면 공위시대(한 국왕이 사망하고, 다음의 국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공백사태)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정치를 닮아가는 종교(동시에 종교를 닮아가는 정치)'이다. 즉 최근에는 종교인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정치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단 저를 믿으세요."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의 불길한 초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단 믿으라는 이 시대에,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언술들이 잘 먹혀들어가는 이 시대에는 개인들은 무엇인가 붙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북극곰이 떠다니는 해빙들에 어떻게든 매달려 있기 위해 꽉 붙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 트위터일수도 있고, 페이스북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고, 인스턴트 섹스일 수도 있으며. 유행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물론 알라딘 서재일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것들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은 점점 사람들을 각각의 벽 속의 한정된 구획 안으로 몰아넣고, 그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갇혀있도록 만들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극명한 하나의 예(아마도 바우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 풍경을 본다면 이 책에 하나의 사례로 쓸 것이라 생각하는데)를 들어보자. 어떤 젊은 남녀가 커피숍에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그들은 그저 서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대화는 트위터에 누가 이런 글을 올렸다느니, 카카오톡으로 누가 말을 걸었다느니 이런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무엇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하나의 커다란 빙하가 아닌 현재와 같이 나뉘어진 유빙(流氷)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구획된 질서라는 커다란 빙하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존재증명의 한 방식이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의 역할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그 매달려있는 세계가 떠밀려가버리면 끝이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존재증명의 가장 유용한 방식은 나를 수없이 다른 나로 쪼개는 것이다. 나를 나뉘어진 모든 유빙들에 최대한 많이 쪼개서 보내는 것. 예를 들어 트위터 속의 나, 페이스북 속의 나, 혹은 파워블로거로서의 나, 쇼핑몰 VIP 고객으로서의 나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벤치마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장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가장 자신을 많이 쪼갤 수 있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최근에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을 어떻게 선정하는가. 물론 그것은 TV에,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가장 많이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다. 가끔 TV에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이 수없이 갈라진 자신을 어떻게 견뎌내지).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을 이들처럼 최대한 많이 쪼개고 싶어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디스토피아에 44개의 편지를 띄운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44개의 부표라든가, 구명보트라든가, 구명조끼, 혹은 우리들에게 보내는 동정을 가득담은 연서(戀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대 세계의 근대인, 즉 우리들이 특별히 무엇인가를 엄청나게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극의 빙하들이 점차 부스러져 떠내려가게 된 것이 북극곰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국가가, 자본이, 종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왔으며, 우리는 그저 보통의 인간들로 보통의 삶을 영위해 왔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어떤 특정한 특성을 기준으로 분포도를 그려보면 그것은 대체로 가운데가 불룩한 '종'의 형태를 가진 가우스 곡선(정규분포곡선)이 되며, 우리들 대다수는 그 불룩한 가운데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우만은 묻는다. 어쩌면 그 가운데가 불룩한 정규분포라는 것, 그 정상성의 범주에 우리들 대부분이 들어간다는 것이 혹시 문제는 아닐까. 책에도 나오지만, 이라크 포로수용소나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가우스 곡선에서 가운데 불룩한 부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만한 아주 '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웃에게 친절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주어진 일을 성심성의껏 해내는,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요구하는 최선의 인물(그러므로 아마도 상당히 유연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그 이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는 것(여기서의 성격이란 '성격 좋다'고 할 때의 그 성격이라기 보다는 개성이나 결단성, 저항성 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며, 또는 반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요구하는 것들, 유연해질 것, 자신을 쪼갤 것,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소비할 것, 사이버 세계로 빠져들 것 등등의 수많은 유형의 무형의 규칙들에 대한 반항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따라야 한다며 몇 가지 규칙을 내밀었고,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빙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44개의 부표를 던져주며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규칙, 새로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생활방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그것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생각하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있다. 몇 개의 편지들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역설적인 것들을 요구하고 있고(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을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역설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이곳이 유동하는 근대이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모두스 비벤디는 점점 의미가 없어지며, 유동하는 근대에서 만들어지는 메시지들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우리의 유동을 도리어 더 강화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쇼핑하라!'는 메시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내부의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그 메시지를 내보내는 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 메시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뒤떨어진 적이 없었고, 그것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따라잡기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라는 메시지는 어떨까.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그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새로운 것들을 따라잡는 사이에 그보다 더 훨씬 새로운 것들이 몇 배는 더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외에도 쏟아지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그러므로 단지 '고독을 되찾으라'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을 되찾는 것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필요한 경계를 긋는 것이다(경계는 동시에 접속 지점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지적에 따르면 벽은 동시에 이곳이 통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행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벽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되살리는 첫 시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없이 쪼개진 자신을 다시 조용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상이라고 규정되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며, 이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면, 그러니까 떠다니는 유빙들을 꽉 붙잡지 않으면 우리가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도 있다. 우리가 그 유빙들을 아무리 꽉 붙잡아도 그 유빙들은 언젠가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더 꽉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작은 유빙에서 더 큰 유빙으로 옮겨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빙들을 결합시키는 것, 더 이상 각자가 외로운 섬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시 역설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가 유빙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어느 정도는 녹여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역설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상이 되기 위해 정상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삶의 태도를 모방하기 위해서 특정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며, 안전해지기 위해서 안전한 울타리를 없애고,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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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0-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쪼개기를 잘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이 힘들지만, 불필요한 일을 복잡한 사회에 살기 때문에 해야 하긴 하지만, 예를들면, 그런 배우가 현명한 것 같고요. 그게 아니라면 그 유명세를 얼만큼 힘들게 치러야 하며, 또 세상에서 자기 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걸 유명배우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어떤 '잘나가는'배우가 그런 걸 이미 알고있다는 듯 태연히 말을 하면 얼마나 기특해보이는지 모르겠어요. 포커페이스. 그 속이 어떤지와는 관련없이..

이 책이 편지글이었어요? 예전에 박범신 작가는 이 사회에 흑백 말고 회색지대를 허용하는 시선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기 주장을 뚜렷이 해서 남에게 휩쓸리지 말라고 하는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거냐,하면서 저 좀 방방 뛰었거든요. 그런데 두 가지가 결국 같은 말이었더라고요. 그러고 저는 한동안 침묵..

고독해질래요. 주말 잘 보내세요, 꾸벅.

맥거핀 2012-10-27 23:23   좋아요 0 | URL
그런데 확실히 자신을 쪼개다보면 가끔 어리둥절해지기는 하거든요. 어디가, 어떤 부분에서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이지 하면서요. (왜 광고 중에 그런 거 있었죠. 직장에서의 친절한 모습과 집에서의 화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집에서도 친절하세요..하는 거. 저는 그걸 보면서 집에서마저도 저렇게 회사처럼 생글거려야하나..싶어서 뭔가 좀 아득해졌거든요.) 하기는 몇 명 안되는 회사에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도 피곤한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잘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는 배우들은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맞는 말이죠. 요즘에는 회색지대를 보여주는 게 도리어 꽤나 용감한 선택의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어요. 요즘에는 대부분 흑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를 원하죠. (그러니까 말씀하신게 결국은 같은 말이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데..그러면 곧 넌 우리편이 아니야,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근데 가끔 궁금하기는 해요. 양비론, 양시론은 거의 항상 쓰레기 취급을 받는데, 그런데, 진짜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릴 때는 어떻게 해야하죠?)

그래요. 주말만이라도 고독하게 보내야죠.

Shining 2012-10-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랑 뷔페를 갔는데 옆 테이블 여자애 둘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각자 핸드폰만 보면서 밥을 먹는 걸 본 적 있어요. 결코 가격이 싼 곳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왔을까 궁금하더군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실컷 대화(수다와 토론과 진지함이 섞인..)만 하다 왔는데 말이죠. 저흰 둘 다 스마트폰도 없고_- SNS도 게임도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요. 요새는 그게 일반적인 것 같더군요. 사랑에 풍덩 빠진 연애 초창기 남녀도 서로 손 잡고 눈만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습디다(말투가 왜 이래;).

각자 다른 장소, 다른 사람 앞에서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건 그러니까 적절히 쪼개져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현대인들은 참 외로움에 약하구나, 연약한 존재군, 싶습니다.

사람의 고독이란 필요선,이라고 여깁니다. 법정 스님말씀처럼 고독과 고립은 다른거니까요, 뭣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니까요.

맥거핀 2012-10-27 23:35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그런 게 흔한 풍경이죠. 가끔 오후 시간에 패스트푸드점 같은 데를 가면 잔뜩 앉아있는 중고생들이 각자 열심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더라구요. (예전처럼 수다를 하느라 정신없거나 하는 것은 훨씬 덜하죠. 물론 중고생들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구요. 점심시간 회사구내식당은 또 어떻구요.)

근데 뭐 그런 휴대폰 중독자(?)만 뭐라 할 수 없는게 생각해보면 바우만의 말대로 대부분 현대인들은 뭐 한가지에 빠져있기는 하거든요. 동시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흔한 일이구요.(저도 지금 알라딘 서재를 둘러보며, TV로 축구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못 버티는 거죠. 물론 저도 그렇구요. 근데 문제는 점점 그런게 자기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지만, 이제는 중독을 권하는 사회랄까. 조용히 고독을 즐기는 것을 요새는 주위에서 거의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가만히 있는 것을 죄악시하는 이상한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죠.

암튼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이상한 사회가 되고 있어요.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무엇이 제정신인지 점점 알수가 없어진다는 거죠.

아..근데 정말 보기드문 자매군요.(이번에 개봉한다는 모 영화가 살짝 연상이..)

Shining 2012-10-28 00:05   좋아요 0 | URL
수다 떠는 건 그거대로 비생산적일 때도 많고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같이 앉아서 핸드폰만 보는 아이들(또는 어른들)보면 왠지 씁쓸하더군요. 나이 든걸까요?

하긴, 주변에서 보면 대화를 하다보면 무슨 말이든 우선 검색하고 보더군요_- 전 검색을 못 하니 혼자 울그락불그락하며 기억해냅니다;;(지난번에 허우 샤오시엔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머리카락이 다섯 개는 뽑혔어요) 고민도 하고 떠올리기도 해야는데, 말만 막히면 바로 네이버를 두드리는 친구 모습에 혀를 끌끌 차는 노인네스러운 모습을...

그렇군요. 제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둘 다 비문명인이라?-_ㅠ 어느 쪽의 보기드뭄입니까ㅋ

덧) 젖은 밤에 듣는 유재하의 음악은, 최고군요. 언제든 그는 최고지만요.

맥거핀 2012-10-29 17:44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읽다가 보니 얼굴이 붉었다, 파래졌다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하는 모습을 상상해버렸습니다.ㅎ 그런 것과 꼭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암튼 살짝이라도 잘못말하면 엄청 공격이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블로그에 글 하나 쓸때도 별 사소한 사항이라도 검색을 하게되요.(문제는 그러고도 늘 틀린다는 겁니다만...) 근데 사실 뭐 이게 무슨 외교협정문도 아니고, 몇 개 틀리면 어떻다고...

...원래 나이든 걸까요?라고 물어보는 게 나이들었다는 증거입니다.ㅋ

저도 요새 옛날 음악을 듣게 됩니다만, 그 중에 특히 들국화를 열심히 듣고 있어요. 물론 유재하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