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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평점 :
1927년에 나온 [황야의 이리]는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 같은 헤세의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 작품은 서두의 '편집자의 서문'과 본문이라 할 수 있는 '하리 할러의 수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리 할러의 수기' 속에 작자 미상의 '황야의 이리론'이라는 소책자의 전문이 들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도스토예프스기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이 다시 찾아 왔다. '~~의 수기' 했을 때 일찌감치 알아봤어야 했다. '정상'의 범주와는 거리가 많이 멀다. 아예 대놓고 '미친 사람만 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고 부르는 하리 할러는 50세 안팎의 인물이다. 독일의 어떤 마을 하숙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약 열달 동안 머무르다 갑자기 사라진 이 중년의 남자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조카('편집자의 서문'을 쓴 그 편집자이기도 하다)의 눈에는 그야말로 낯설고 이상한 남자였다. 그러나 처음의 불쾌한 첫인상은 그와의 몇번의 대면과 대화, 그리고 관찰을 통해 서서히 변해간다.
그는 항상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공정했으며,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진지하게 거의 영웅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율이 마음속 깊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생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의 본보기였으며, 자기 증오는 지나친 이기심과 똑같아서 종국에는 끔찍한 고립과 절망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 21쪽, '편집자의 서문' 중에서
어느날 하리는 수기의 원고와 쪽지를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다. 그것을 보고 하리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된 편집자는 이를 출판하기로 하고 혹시 있을 지 모를 독자의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서문을 남긴다. 사실 누군가에 의해 제정신으로 쓰여진 부분은 이 서문 뿐이다.
할러의 수기는 병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깊은 성찰이 담긴 환상적인 글이다. 만약 내가 이 원고 뭉치를 누가 썼는지 모르는 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다면 틀림없이 버럭 화를 내며 집어던졌을 것이다. ~ 내가 이 수기에서 발견한 것이 감정이 병든 불쌍한 한 인간의 병적인 환상뿐이었다면 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기록인 것이다. - 34~35쪽, '편집자의 서문' 중에서
본격적으로 하리 할러의 수기가 시작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수기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바로 '미친 사람만 볼 것'. 읽어나가다 보면 멀쩡한 사람도 미칠 지경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없고 등장하는 헤르미네, 파블로, 마리아 같은 인물들이 실재하는 사람인지 상상속의 또 다른 하리인지도 헷갈린다. 갑자기 늙은 괴테가 등장하는가 하면 모짜르트와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술과 담배는 기본이고 마약에 동성애적 분위기, 집단 성교, 살인에 이르기까지... 나올 수 있는 건 죄다 나온다. 독일의 문학평론가 요하임 숄의 말처럼 '방탕한 삶의 지침서'로 잘못 해석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냥 자극적인, 말초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주인공 하리 자체가 미쳤을 망정 방탕한 인물이 아니다. 외톨이이지만 사색가인 그는 반전사상이 담긴 글을 기고할 만큼 사회비판의식이 있는 지식인이다.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그는 하는 일이라곤 도서관에 다니거나 하숙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것이 거의 다다. 모짜르트, 바하, 헨델 같은 클래식에 심취해 있고 비록 그의 삶은 불규칙적이지만 시민사회의 질서를 동경한다. 자동차나 라디오 같은 문명의 이기나 대중화된 값싼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춤도 못추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고향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황야의 이리요, 시민 세계를 혐오하는 사람이지만, 어쩌다 보니 줄곧 전형적인 시민의 집에서 살아왔다. - 하리 할러의 수기 41쪽
요건대 황야의 이리는 두 개의 본성, 즉 인간의 본성과 이리의 본성을 함께 지녔다. 이것이 그의 운명이었다.~그에게는 인간과 이리가 병존하지 못했고, 서로 돕는 일은 더 더욱 없었으며, 둘은 줄곧 철천지 원수처럼 맞서서 한 쪽이 다른 쪽을 괴롭혔다. - 황야의 이리론 60~61쪽
문제는 '황야의 이리론-미친 사람만 볼 것(59~93쪽)'에서 밝힌 것처럼 하리가 정신분열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과 이리의 본성 사이에서 자신의 설곳 갈곳을 잃고 있다.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본성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천개의 영혼을 지닌다.'는 언급이 여러번 등장하는데 그만큼 시시때때로 다양한 얼굴이 수천장의 거울로 장식된 방에서처럼 불쑥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때로는 연속성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본다. 돌변한다. 뭔가 불만이 가득하다. 다른 말로 점잖게 말하면 문명비판적이고 사회의 병리현상을 혼자 짊어진것처럼 고뇌한다.
작가 헤세 자신인지, 아니면 헤세의 이상적 인물상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하리의 또다른 자아인지 모를 헤르미네(소설에서는 고급 창녀로 등장, 헤르만의 여성형)와 그녀의 애인(?) 파블로는 하리가 경멸해 왔던 그와는 반대쪽에 있는 부류들이다. 그런데 하리는 그들이 제공하는 온갖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앞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주 그들과의 대화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기도 하고 더 큰 지혜도 얻는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헤르미네의 말은 모두가 그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혜안을 가진 헤르미네가 내 생각을 읽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나에게 제시함으로써, 내 생각은 모양이 잡혀 새롭게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219쪽
언젠가 헤르미네는 하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리는 '자살'에 관해서도 상당한 논리로 무장해 있다. 파비안과 나체로 누워있는 헤르미네의 가슴에 칼을 꽂는 하리, 그는 살인한 것인가? 자살한 것인가? 이리를 죽인 것인가? 인간을 죽인 것인가? 상징에 불과한 것인가?(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이 찌른 것은 그림이었을까? 자기 자신이었을까?) 풀리지 않는 속임수가 난무하는 '마술극장'이다. 도식을 그려 봤다.
헤르만 헤세 = 하리 할러(인간 하리 + 황야의 이리) = 헤르미네 = 파비안 = 마리아 = A = B ...
헤세가 이 소설을 쓸 당시에는 '자살'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이 휩쓸고 간 당시 독일은 많은 지식인들이 비슷한 상황이었을 테다. 가족문제, 작가로서의 번아웃 신드롬에 사라잡혀 있던 헤세는 심해지는 우울증과 전쟁으로 치닫는 전체주의에 사로잡힌 조국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황야의 이리]라는 정신분석 입문서(?)를, 지식인을 대표해서 내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집자의 말처럼 시대의 '노이로제'를 대변한다는 맘으로.
지금 대한민국은 그때의 독일과 얼마나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