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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날마다 죄를 짓고 후회하고 방황하고 벌을 받게끔 태어난 것이 사람이다. 신이 아니므로 양심이라는 혹 때문에 감정이라는 장신구 때문에 하루도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그것이 실정법을 위반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이 간섭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내면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다.
라스꼴리니꼬프는, 특히 그런 사람이다. 한때 대학생이었던 그는, 사회의 부조리에 눈감지 않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이성적이지만 격정적인,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벌레같은(그의 생각이다) 전당포 노파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사람을 죽인게 아니라 '이'를 죽인 것이다. 나폴레옹 같은 '비범한' 사람은 법과 도덕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살인을 통해 스스로가 비범한 사람인지 직접 묻는다. 일종의 '테스트'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아무리 정교한 논리를 가져다 붙혀도 그는 그의 행위에 초연할 수 없었다. 고열, 악몽, 죄의식, 발각될 공포, 주변의 시선 등 온갖 잡다한 것들로부터 시달린다. 운좋게 살인 자체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고 저질렀지만 그 이후의 모든 상황은 자신의 통제 밖에서 움직인다. 자신의 이성과 감정 조차도 조정하지 못하니 그는 범인(凡人)에 불과함이 드러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곤 '자살'하느냐 '자수'하느냐만 남는다.
주인공 로쟈(라스꼴리니꼬프) 말고도 주목해야 할 등장인물이 여럿이다. 먼저 주인공을 중심으로 어머니 뿔헬리야와 여동생 두냐, 절친 라주미힌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로쟈는 정녕 까칠한 캐릭터 그 자체다. 어머니의 지난친 관심과 기대도 지겹고 여동생의 막무가내식 희생도 참을 수 없으며 친구의 배려도 귀찮기만 할 뿐이다.
가족과 친구 이외 주정꾼 퇴역 하급관리 마르멜라도프의 가족도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는 친딸 소냐를 데리고 아이가 셋 있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와 재혼했다. 직업도 변변치 않게 대가족을 이끌다 보니 맨날 구박만 받는다. 소냐가 매춘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지경에 이르자 더욱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르멜라도프, 술에 취한 채 마차에 치여 죽게되고 까쩨리나는 추도식을 성대하게 준비한다. 이 가족과 로쟈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로쟈의 살인과 함께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이 이 비참한 가족의 파멸과정이다.
그리고 예심판사 뽀르삐리, 두냐의 약혼자 루쥔과 두냐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심각하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다. 인물뿐 아니라 그의 질문들도 그렇다. "빈곤이 죄가 될 수 있는가?", "몇몇의 비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수 있는가?",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등등. 이런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만해도 책을 읽은 보람이 있겠다.
p. s. 주인공이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은 많은 우연히 겹치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스릴러 소설보다도 긴박감이 넘쳐 흐른다. 작가가 작정하고 추리소설이나 스파이물을 썼어도 굉장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
접어두기
"근본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개인적인 자선을 부정한다." 587쪽
"나는 다만 '이'를 죽인 것 뿐이야, 쏘냐. 무익하고 추하고, 해로운 '이'말이야." 611쪽
"그런데 어떻게 죽였지? 살인이 그렇게 행해지는 건가? 내가 한 것처럼 그렇게 살인하러 가는 사람도 있을까! 내가 과연 어떻게 걸어갔는지 언젠가 내가 나중에 이야기를 해주지..... 내가 과연 노파를 죽인 걸까? 나는 나 자신을 죽였어, 노파가 아니라! 그렇게 단칼에 나는 나 자신을 영원히 죽여 버린 거야....! 그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이지, 내가 아냐..... 이제 됐어, 소냐. 이제 됐어, 충분해! 나를 내버려 둬." 그는 갑자기 격렬한 비탄에 사로잡혀 외쳤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616쪽
1백 마리의 토끼로 결단코 말(馬)을 만들 수 없고, 1백 가지의 혐의로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다. - 영국 속담 664쪽
"바로 제가 그때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의 여동생 리자베따를 도끼로 살해하고 돈을 훔친 사람입니다." 일리야 뻬뜨로비치는 입을 딱 벌렸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백을 되풀이 했다. 7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