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어쩌면 너무 쉬우면서도 동시에 그럴 수 없는 문제이다. 

남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내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을 예감하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보았던 자코메티의 조각에서도 ‘실존’은 머릿속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 정신이 언제부터 내게 깃들게 되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과거의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인지. 


아울러 내가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인지. 복잡하고 번잡한 생각을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일지, 혹은 나만이 특이하게 하고 있는 것일지. 


사고의 폭이 사람마다 동일한지 혹은 다른 것인지. 동일하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없으며, 다르다고 했을 때는 누구를 기준으로 측정해야 하는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을 때, 한계적인 삶이 어느 순간 느껴질 때.


단순한 ‘불안’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나를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가 내가 사라지면서 함께 멸망할 것이다.
  

  
실존의 공포와 불합리.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상이 필요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의식

이제 인간은 비극을 통해서 실존에 대한 탐욕스러운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비극 예술을 만들어 낸 저 광기, 즉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도덕 앞에서 삶은, 삶이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까닭에, 늘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것, 음울한 것, 슬픈 것, 암담한 것, 뜻밖의 장애들, 우연의 조롱, 불안한 기대들, 즉 삶의 "신적인 희극" 전체가 지옥과 함께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만약 실존이 보다 높은 영광에 둘러싸여 그리스 신들 속에 표현되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민감하고 그렇게 격렬하게 탐하고 유일하게 고뇌하는 능력을 가진 그 민족이 실존을 달리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 근원적인 일자는 영원히 고통 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찬 자로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하여 동시에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
  

실존은, 신들 속에서 혹은 불멸의 피안에서 빛나는 자신의 모든 반영들과 함께, 부정된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여기, 이러한 의지의 최고 위험 속에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오직 예술만이 실존의 공포와 불합리에 관한 저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표상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근본 인식, 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관점, 미와 예술은 기쁨을 주는 희망이며 다시 도래할 일치의 예감이라는 견해 말이다.
  
  
이론적 인간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결과에 놀라 실존의 무서운 빙하에 감히 몸을 담그지 못하고, 강가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바로 저 "단절"의 특징이다
  
  
비극은 동일한 비극적 신화를 통해, 비극적 주인공인 인물 속에서, 실존에 대한 탐욕스러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이 민족은 그렇게 아름답게 될 수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해야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나를 따라와 비극을 보세. 그리고 나와 함께 두 신의 신전에 제물을 바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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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07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멀쩡하던 신체 부위가 어느 날부터 기능을 하지 못하면 단순한 불안이 아닌 공포가 생겨요. 시력이 갑자기 떨어졌을 때 그런 정서적 경험을 겪였어요.

방랑 2018-03-07 21:55   좋아요 0 | URL
에구.. 지금도 안좋으신가요? 저는 올해 목표가 나를 낭비하지 않기, 인데 쉽지 않네요.

cyrus 2018-03-07 21:57   좋아요 0 | URL
다행히 일시적인 반응이었어요. 원인이 좀 어이가 없는데, 콘택트 렌즈를 너무 오래 착용하는 바람에 시력이 떨어졌어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
 

예술가에 대한 평가가 그의 인생을 꼭 알아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인생에 대한 배경지식이 작품 자체를 해석하는데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이른바 후광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자코메티의 작품이 몇 억에 낙찰되었다더라, 혹은 자코메티가 피카소, 사르트르와 교류했다더라 하는 사실들이 그의 작품 해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본 그의 작품, <걸어가는 사람>을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보았을 때 느껴진 압도적인 감각. 숨을 쉬지 못할 것 같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라고 정의내리고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과하는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내려질 죽음의 순간, 그 찰나의 두려움을 알기에. 죽음 앞에서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자코메티가 마지막에 집착한 인간의 ‘눈’, 시선이야말로 찰나의 두려움을 담고 있는 인간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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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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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의 이야기
현실 속의 현실


우리는 누가 진짜를 말하는지는 관심이 없다
솔직히 남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나에게 올 차례를 위한 사전작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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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지 않아도, 모든 재니는 아름답다.


연하의 남자와 마을을 떠났던 여자, 재니가 다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걱정하는 척 하지만, 시샘 혹은 재미삼아 하는 오지랖이다.



재니는 첫 번째 결혼을 했었다. 할머니가 맺어준 사람과. 할머니는 재니가 백인처럼 집에 편하게 앉아서 쉬는 ‘사모님’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재니는 결혼을 해도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재니는 두 번째 남자를 만났다. 조디는 마을의 영웅이자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재니는 행복하지 않았다. 조디는 재니의 젊음, 그리고 아름다움을 두려워해서 질투하게 된다. 그래서 조디는 재니의 나이를 들먹거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외모를 지적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길 원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니는 세 번째 남자, 티 케이크를 만났다. 재니는 자신의 재산을 탐내는 것이 아닐지, 자신을 찾아온 연하의 남자가 의심스럽지만 결국은 사랑에 빠진다. 물론 티 케이크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재니의 200달러를 가지고 도박을 한다거나, 재니가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경악할 일이다.) 



재니에 의해 죽게 되는 티 케이크. 재니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분명히 여러 장면에서 깊게 생각해 볼 만하다고 느꼈는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나니 재니라는 주인공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인종문제, 여성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한 인간에 대해서 담고 있지만 재니는 만족스러운 주인공은 아니었다.



재니는 사랑을 찾아서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뿌리치고 나섰다. 그러나 그 외의 행동에서 재니의 적극성을 보긴 어렵다.



이 글이 여자에 대해서 담고 있는 글이라면, 젊고 아름다운 재니의 모습만을 보여주어서는 곤란하다. 재니가 늙어버린, 또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였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찾게 되는지를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젊고 아름다운 재니만 여자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을 재니, 늙어서 혼자 살고 있을 재니, 병들고 추하게 된 재니.



그래도 모든 재니는 아름답다. 
그것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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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가족이라고 서로에게 위로와 사랑만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가 내뱉는 말들이 나에게 날카로운 칼이 된다. 

남이야 무정하다고 넘길 수 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마저 버림받고, 조롱받고, 비난받는 기분이란. 
  
  



허먼 벨빌, 모비딕(상,하)
모비딕을 잡기 위한 노력. 고래를 잡기 위한 여정은 길고 험난하다. 

고래에 관련된 백과사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된 부분이 있다. 

이교도와 관련된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순수이성 비판 서문
이성적 능력에 대한 비판적인 탐구. 도대체 이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겼을까? 

이성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과 이성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것 역시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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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8-01-16 0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장바구니 추가해 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방랑 2018-01-16 07: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페이퍼를 쓰려니 글이 잘 안 써지네요ㅎㅎ 올해는 많이 읽고 자주 써보려구요. 초딩님의 글도 기다릴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