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노트르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4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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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향한 숙명적인 사랑, 결국 파리의 먼지가 되다.



솔직히 말해서 파리의 노르트담 1권은 정말 꾸역꾸역 읽었다. 언제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라 에스메랄다와 카지모도가 등장하기를. 그러나 1권은 그런 기대를 무너뜨리고 독자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만든다.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도 그럴 것이 1권에서는 뮤지컬 장면이 아니라 파리의 장면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파리가 얼마나 멋지고 웅장했는지, 이것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건축물의 묘사, 풍경의 세세한 묘사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따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파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가보지 못한 자이거나 혹은 가보았던 자를 가릴 것 없이 `동경`을 느끼게 하지 않던가. 낭만의 도시, 파리. 유럽을 여행하는 이에게 빠질 수 없는 필수 코스. 누구나 파리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파리를 위고는 자신의 사랑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파리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욕망의 도시 서울, 서울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은 역시 한강이다. 군청색의 강물 위로 색색이 비치는 자동차의 가장 행렬, 스포트라이트가 살아 있는 도시. 밤 열 시 무렵의 한강.



1,2권을 다 합하면 900페이지 정도가 될 텐데,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600페이지부터이다. 그러니 그 앞의 부분은 피날레를 위해 참고 참으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 여자를 향한 세 남자의 사랑은 각각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카지모도의 사랑은 그녀를 구해주고 보살펴주는 `희생`, 부주교의 사랑은 그녀를 파멸시키고 함께 떨어지는 `타락`, 페뷔스의 사랑은 그녀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정열`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사랑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 여자를 향한 숙명적인 이들의 사랑은 결국은 먼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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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5-06-07 0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풍경 묘사... 후다닥 넘기고 싶지만 잠정적 작가를 꿈꾸다보니 그러면 안 될것 같아 넘기고 싶어도 꾸역꾸역 읽고 연상해 봅니다... 빅또르 위고... 아직 못 읽었는데 볼 작가들이 너무 많네요. 또 좋아하는 작가만나면 다른 작품도 봐야하고... 찰스 디킨스도 아직 못 접했고.. 바쁘다 바뻐~ 리뷰를 보며 더 힘을 내야겠다고 푸념하고 갑니다~^^

방랑 2015-06-07 01:22   좋아요 0 | URL
저도 못 읽은 책이 많은 걸요. 잠정적 작가를 꿈꾸고 계시다니 응원해드릴게요! 좋은 작품으로 후일 만나길 기다리겠습니다~

fledgling 2015-06-07 01: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근데 언제 꿈이 또 바뀔지 제 자신도 몰라 `잠정적`이라고 형용사를 붙였죠.ㅎ우리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파리의 노트르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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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향한 숙명적인 사랑, 결국 파리의 먼지가 되다.



솔직히 말해서 파리의 노르트담 1권은 정말 꾸역꾸역 읽었다. 언제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라 에스메랄다와 카지모도가 등장하기를. 그러나 1권은 그런 기대를 무너뜨리고 독자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만든다.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도 그럴 것이 1권에서는 뮤지컬 장면이 아니라 파리의 장면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파리가 얼마나 멋지고 웅장했는지, 이것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건축물의 묘사, 풍경의 세세한 묘사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따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파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가보지 못한 자이거나 혹은 가보았던 자를 가릴 것 없이 `동경`을 느끼게 하지 않던가. 낭만의 도시, 파리. 유럽을 여행하는 이에게 빠질 수 없는 필수 코스. 누구나 파리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파리를 위고는 자신의 사랑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파리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욕망의 도시 서울, 서울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은 역시 한강이다. 군청색의 강물 위로 색색이 비치는 자동차의 가장 행렬, 스포트라이트가 살아 있는 도시. 밤 열 시 무렵의 한강.



1,2권을 다 합하면 900페이지 정도가 될 텐데,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600페이지부터이다. 그러니 그 앞의 부분은 피날레를 위해 참고 참으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 여자를 향한 세 남자의 사랑은 각각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카지모도의 사랑은 그녀를 구해주고 보살펴주는 `희생`, 부주교의 사랑은 그녀를 파멸시키고 함께 떨어지는 `타락`, 페뷔스의 사랑은 그녀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정열`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사랑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 여자를 향한 숙명적인 이들의 사랑은 결국은 먼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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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간이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광기와 비극.



이 책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쓴 소설로 극중에서는 스트릭랜드라는 주인공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종종 뛰어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 자질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모차르트가 그러하듯이 예술적 재능의 발현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어떤 강제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천재는 재능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 전혀 연습을 하지 않은 것처럼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은 것처럼 자유분방하면서도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천재구나, 따라갈 수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천재는 특히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수학이나 과학 분야의 천재를 `똑똑하다, 부럽다` 정도로 느낀다면, 음악이나 미술 혹은 문학 등의 예술 분야의 천재는 `신비하다, 환상적이다`라는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흔히 예술적인 천재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평범한 삶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고흐는 자살하지 않았으며, 베토벤은 귀가 멀지 않았고, 성격이 온화하고 차분했으며 다정하고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이런 이야기는 그 예술가들에게 우리가 가진 `환상`을 깨지게 만든다. 그들에게서 느끼는 천재성이 사그라지는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 예술 작품이 더 가치가 있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냈구나, 역시 평범한 삶은 이런 것은 꿈도 못 꾸지. 어쩌면 이것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과 천재를 가르기 위한 우리만의 `위안`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광기와 비극이라는 `벽`이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광기어린 삶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작품에서 등장하곤 한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광화사>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살인쯤은 용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함께 읽어봐도 좋다. 덧붙이자면 달과 6펜스의 마지막 부분은 사족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90페이지 정도는 없어도 깔끔하지 않나 싶다. 물론 작가는 타히티에서의 스트릭랜드(폴 고갱)를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굳이 없어도 우리는 예술가로서 고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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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0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처럼 천재에 대한 오해는 우리의 환상에서 나왔죠.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아버지의 강제적 교육과 애기 때부터 무수한 음악경연을 하며 쌓아온 실력에서 기반된 것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하며(아이의 적성과 능력을 배려하지 않은 영재교육의 폐해는 어느 시대든 있었겠지요) 발자크, 베토벤 등의 원고들을 보면 그들의 노고가 생생하게 드러난다고 하죠^^ 괴테나 요네하라 마리 등은 `재능은 그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 말인즉 부단한 노력은 빛날 수밖에 없다란 뜻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작품에 매진하다보니 인간관계에 대체로 서툴고 극단에 치우치다보니 삶이 비극적으로 향하는 게 안타깝죠.

방랑 2015-06-04 17:41   좋아요 0 | URL
네, 또 한가지 왜 천재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을 전하지 못함을 아쉬워하게 하는 것일까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기형도나 이상의 경우, 농담삼아 친구와 말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이 나이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있음은 천재가 아니라서일까, 하고요.
물론 평범한 사람으로 소소하게 느끼는 고통과 행복을 즐겨야겠지만요.

좋은 댓글 감사드리며, 메르스로 번잡한 가운데 조심하시기를.

AgalmA 2015-06-04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카소 같이 장수한 예술가도 있는데, 천재와 요절을 우리가 너무 접목시키려하는 경향도 있다고 봅니다. 사건의 특수성이 있는 천재 예술가도 분명 있지만, 전쟁상황이나 시대적으로 제대로 된 의학이 없는 시대여서 요즘같으면 쉽게 고칠 수 있는 폐렴, 폐결핵 등으로 사망한 예술가도 무척 많으니까요.

분명 어느 시기에 빛나는 창작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예술가가 평생에 걸쳐 보여주는 예술의 경지를 보는 기쁨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는 거겠죠^^

염려 감사드리며, 방랑님의 평안도 기원드립니다/

fledgling 2015-06-04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테나 톨스토이도 80세 넘게 살았죠. 죽음으로 업적이 커보이는 과대효과도 없지않아 있다고 봅니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다가 죽고나서야 관심받고, 현 시대에는 마케팅으로 상업적으로 포장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란 어쨌든 애도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인생이 무서운 이유는 벗어날 수 없는 진부함 때문.


늘리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짧게 압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편의 미덕은 자신이 할 말만을 짧게 전달하는 데 있다. 물론 단편에는 극적인 사건의 구성이 있어야겠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또한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기억에 남는 단편은 <공포>, <베짱이>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에서의 선택에 대해서 진심어린 충고가 가능할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작 자신에 대해서도 선택에서의 확신을 내리지 못한다. 결국 진부함이 갖는 현실을 두려워하게 된다. 나는 좀더 특별하게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진부하게 살고 있구나. 이래서 저승 세계보다 인생은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무섭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생에서 공포를 찾지 않고 유령이나 환상에서 찾는다.


단편을 읽는 것은 부담이 덜하다. 사실 읽었던 단편선 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김동인 단편선>, <현진건 단편선>이다.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은 제외하고 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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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페스트 속에 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페스트를 읽는 순간, 우리가 메르스 바이러스에 휩싸였다는 점이다. 재앙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오랑 시민들은 휴머니스트들이다.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속보로 전해지는 감염자의 수 역시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세 명, 열 명, 삼 십명. 숫자는 통계일 뿐이고 아직은 나와 먼 이야기이며, 늘 그렇듯이 내일은 뭘하지 이사를 가야하는데 이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 놓는 것이다.


페스트 대응 초기 모습이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를바가 없고, 심지어 명칭인 `페스트`를 가지고서도 한참을 의논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질병, 그러나 무시무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페스트. 페스트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영웅주의를 강조하지 않는 측면은 마음에 든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늘 영웅을 기대하는데, 선하면서 다른 사람에 맹목적으로 봉사하는 인간의 존재는 현실에서 믿기 힘들다.


어린아이가 죽어갈 때 느끼는 의사 리유의 분노, 그러나 이 마저도 신의 사랑으로 믿는 파늘루 신부. 신부의 죽음은 자신의 믿음을 철저하게 증명한다. 페스트가 아니면서 페스트에 걸렸던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범죄자인 코타르는 오히려 페스트 상황을 즐긴다. 정상이 아닌 상태가 그를 무엇보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관념 하나로 탈출을 시도한 랑베르,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타루.


메르스 바이러스 상황에서 <페스트>는 단 하나의 교훈을 보여준다. 그것은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예언은 아니다. 페스트를 이겨낼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근거 없는 희망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실성,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견디면 찾아올 마지막의 순간은 반드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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