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 연애 소설 읽는 노인 44쪽에서 -
겨울이 길다고
걱정하지 말자.
겨울이 길면
봄은
순식간에 찾아오니까.
1.
같은 하늘 아래서 눈폭탄을 맞아 고립된 곳이 있는가 하면 하루종일 어둡고 낮게 내려 앉은 하늘에선 비만 오락 가락한 곳도 있다. 깊은 겨울 밤 잠깐 내린 눈이 계족산 꼭대기를 살짝 덮었을 뿐 좀처럼 함박눈을 보기가 힘든 겨울이다.
올 겨울이 시작되면서 아파트 입구에 붕어빵을 파는 트럭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흑미 찹쌀을 섞어서 붕어빵 반죽을 만드시는데 겉은 바삭하고 안은 쫄깃쫄깃해서 찰떡맛이 난다. 무엇보다도 붕어빵 머리부터 꼬리까지 듬뿍 넣은 달달한 팥이 너무 맛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냐... 우리 가족은 보약 챙겨 먹듯이 매일매일 2,000원어치의 붕어빵을 사먹고 있다. 이 겨울이 끝나가는게 아쉽다면 단연코 붕어빵을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입맛도 사람도 길들이기 나름이다. 어떤 일에 익숙해지면 길들여진다. 내가 올 겨울 붕어빵을 자주 먹으며 그 그 트럭 아줌마의 흑미찹쌀 붕어빵에 입맛이 들여진 것 처럼 사람도 자주 만나면 길들여진다.
길들여진다는것은 결국 익숙해지고 닮아가는 것 아닐까 ?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친구가 최근에 폭풍의 언덕,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며 심지어 문학동네 카페나 알라딘에 와서 책 소개나 기사를 찾아 읽곤 한다. 함께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비록 아직은 여전히 주인공 히스클리프의 이름을 발음하는데 헤매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의 변화는 아름답다.
2.
몇 년동안 쌓아 놓은 채 정리를 하지 않았던 책들을 마음 먹고 정리 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켜켜히 쌓인 먼지와 책꽂이 깊숙한 곳에서 몇 년동안 사람의 눈빛 한번 받지 못한 책들 그리고 다양한 사연을 안고 나에게 온 책들이 빼곡하다. 한권 한권 먼지를 털어내고 정리를 하면서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 했다. 도대체 나에게 이 많은 책들이 어떤 의미일까 ? 난 왜 이렇게 긴 세 월동안 많은 책들을 모았을까 ? 지금은 내가 정리하고 있지만, 만약 내가 죽고 난 후라면 이 많은 책들을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 아들에게 정말 물려주고 싶은 책을 제외하고는 기부를 해야겠다. 아니면 내가 죽고 난 후 내가 정말 좋아했던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나눠주고 싶기도 하다. 오랫동안 이 책을 아껴줄 사람에게 주고 싶다. 책을 짐으로 여기지 않을 사람... 그리고 그 책을 보면서 나를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
정리가 너무 힘들어서 앞으로는 정말 꼭 필요한 책, 정말 갖고 싶은 책만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만에 하는 육체 노동에 완전 지쳐버린 주말이다. 새로 읽기 시작한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다 읽고 싶지만 너무 피곤하다. 아마도 내일 오전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