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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
서정오 지음 / 현암사 / 2003년 7월
평점 :
저자 - 서정오
우선 신화와 설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미리 짚고 글을 시작하겠다. 신화는 신적인 대상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고, 설화는 한 민족 사이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즉, 주몽 이야기는 그의 부친이 신이기에 건국 신화가 되는 것이고, 구미호 이야기는 그냥 설화 또는 민담 내지는 괴담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하고 한글로 된 책을 읽고, 한글 간판이 즐비한 거리를 다니면서 한국 배우들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정작 한국 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게네스나 클라이템네스트라 또는 아리아드네 같은 서양 이름에는 익숙하지만, 신산만산할락궁이나 개울각시같은 한글 이름은 낯설기만 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단군이라든지 박혁거세나 알영 같은 이름은 익숙하다. 그것은 어쩌면 건국 신화를 시작으로 하는 왕 중심의 역사 교육이 현재
교과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신화는 나라를 만들면 그것으로 끝이 나버린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과 박혁거세도,
바위를 타고 바다건너 일본으로 간 연오랑 세오녀 부부도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신화는 끝이 난다. 그나마 더 나온다면, 가야의 김수로 왕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부인을 맞이했는지, 고구려의 주몽은 누가 후계가 되었는지가 더 첨가되어있다. 물론 그 경우에도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끝이
난다.
그러면 왕을 제외하고는 신화나 설화에서 나올 인물이 없단 말인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왕 얘기가 아니면,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주 많았다. 그 중에는 바리데기 공주처럼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접했던 이름들도
있었고, 또 노가단풍자지명왕처럼 난생처음 접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얼마나 우리 것에 대해 무지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방문을 비롯해서 돌담, 부엌 심지어 화장실까지! 물론 만물에 신이 있다는 사상은 예전 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배웠지만, 각각의 신에게 명칭을 주고 개성을 불어넣었으며, 어떤 연유로 그 곳을 지키게 되었는지 각각의 사연을 읽으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으며 이런 나쁜 놈을 왜 신으로 만들었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또한 조상들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모든 것은
신들의 보살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죽은 후에도 살아있을 때 얼마나 남을 위해 봉사를 했는가에 따라 염라대왕의 판결이 내려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덕을 베풀며, 미물이라 해도 함부로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는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 대두되는 친환경 정책을 우리 조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는 말이 나온 걸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부재였다.
모든 신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신화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초반에 잠깐 나왔다가,
후반에 다시 나올 뿐이었다. 속된 말로 씨만 뿌리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아들들이 장성해서 찾아갔을 때야 반갑다고 눈물지으며 거둬주는 역할이었다.
하긴 건국 신화에서도 그런 부분은 볼 수 있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도 유화 부인과 며칠 놀다가 하늘로 떠나버렸고, 그 아들 주몽 역시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지만 그러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아버지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옥황상제 천지왕도 서천꽃밭 꽃감관도, 칠성님도 다 그러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부인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어야 했다. 재미있는 건, 어떻게 된 것이 그런 자식들은 거의 다 아들이다. 이윽고 장성한 아들들은 아버지를 찾길
원했고, 어머니를 혼자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버렸다. 남편도 아들도 다 떠나고 홀로 남은 여인들은 또 고생만 하다가 외로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면 아버지를 찾은 아들들이 그제야 어머니를 찾아와 한바탕 슬피 울고 서천의 꽃밭에서 꽃을 가져와 죽은 어머니를 다시 살려낸다.
그리고 온 가족이 웃으면서 마무리는 훈훈하게 마무리……는 개뿔. 결국 예전에 유행했던 개그 프로에서 우스갯소리가 사실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 나라의 전통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여자들이 자기 할 거 다 하면 소는 누가 키워?’
처음에 남자 개그맨의 저 말을 들었을 때, 왜 여자들이 소를 키우는 걸까라고 의문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년 만에 드디어
해답을 얻었다. 집안일에다가 논일 밭일도 혼자 다 하고, 소까지 혼자 키우고, 거기다 자식까지 키우면서 남편 봉양하는 것은 부인이 할 일이다.
반면에 집안 살림은 물론이거니와 자식 양육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다가, 나중에 장성한 아들의 봉양을 받는 것이 남편의 역할이라고 신화는 말하는
것 같다. 아, 그래서 모든 것은 부인에게 맡기고 바깥으로 돌기만 하셨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었던 거구나. 거기에 축첩은
기본이고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전통을 잘 지키고 있었다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책임감이 없으셨다고 해야 하는
걸까?
물론 신화를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랬다면 막장 불륜 드라마 뺨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당장 악서로 분류되어 출판 금지를
당해, 우리는 접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비너스 상 같은 예술 작품들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트로이 발굴 역시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세대차가 있으니 시대차도 있는 법.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현대의 눈으로 고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신화는 신화, 현실은 현실이니 말이다. 우리 역사에 이런 놀라운 신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서양의 신들처럼 근친 불륜 스캔들을 저지른다거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부족을 몰살시키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역시 사고는 남자가 치고 뒷수습은 여자가 한 전래 동화들이 떠오른다. 아, 그게 우리의
전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