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 - 迷宮

  작가 - 나카무라 후미노리

 

 

 

 

 

  아무 기대 없이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낯익은 향기를 느꼈다. 글자하나하나마다 찍혀있는 점들! 그 순간 작년에 읽은 소설 '왕국'이 떠올랐다. 아, 그 작가구나!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 작품처럼 빠른 전개와 냉소적이면서 가차 없는 성격의 인물들이 등장할까? 역겨울 정도로 가혹한 현실과 시적인 분위기의 문장이 이번에도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주인공 신견은 어린 시절, R이라는 분신을 만든 적이 있다. 어렸던 그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또 다른 자아인 R을 봉인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그럭저럭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나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고 있다. 우연히 중학교 동창이라 기억되는 사나에를 만난 그는, 그녀와의 관계에 차츰 익숙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탐정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뜻밖의 제안을 한다. 사나에가 사귀던 남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혹시 그녀가 아는 게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탐정의 태도에 반감을 느낀 주인공이었지만, 결국 그를 돕게 된다.

 

  그러다 주인공은 탐정에게서 사나에가 예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가족 피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농담인 듯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하는 사나에를 보면서, 주인공은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음울함 모두를 분신에게 떠넘기고, 모든 것을 잊은 채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아무리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라도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뭔가가 한두 가지씩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흑역사일 수도 있고, 아픈 기억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신견과 사나에 역시 그런 비밀이 있다.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기에 그 둘은 서서히 자기 자신을 감춰야 했다. 신견은 R에게 모든 부정적인 면을 떠넘기는 것으로, 사나에는 수면제가 든 주스를 마시는 것으로 그 사실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절대로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확실히 잊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어두움은 불현듯 자신이 건재함을 일깨운다. 그러면 그들은 불안해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이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것도, 사나에가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비슷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어둠과 같은 어린 시절을 겪었으니까 말이다. 주인공은 그렇기에 사나에 가족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고자 했고, 사나에는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해줄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주인공이 사나에 가족의 비밀을 듣는 순간, 사나에의 어둠을 마주하는 순간, 그제야 그는 잊고 싶었던 자신의 어둠을 받아들인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인간은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냥 눈에 보이지 않게 미뤄두거나 미봉책으로 덮어두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제야 행복을 느끼고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사나에가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은 무척이나 끔찍했다. 어쩌다가 그녀는 그런 일을 겪어야 했을까? 잘못된 만남이 잘못된 인연을 만들고, 그 잘못된 인연이 거짓 포장되어 사랑이라 이름이 붙여지면서부터일까? 아니면 한 사람의 일방적인 집착이 다른 사람의 포기와 좌절을 양분삼아 자랐기 때문일까? 게다가 그 집착은 대를 이어가면서 더더욱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 희생자가 힘없는 어린아이와 여성이라는 점이 제일 화가 났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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