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Death
Comes as the End, 1945
작가 - 애거서 크리스티
이 책은 포와로도, 미스 마플도, 터펜스 부부도, 배틀 총경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영국이나
미국을 배경으로 하지도 않는다. 독특하게도 이 소설은 기원전 2000년 경의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 크리스티가 남편과 함께 중동
여행을 하면서 영감을 받아서 집필했으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글의 기본 설정은 20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다른 소설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집트 왕의 묘소를 지키는 승려 임호테프에게는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위의 두 아들 아모스와
소벡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막내아들 이파는 아직 미혼이었다. 딸인 레니센브는 남편이 죽은 후,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왔다. 큰아들인
아모스는 부인에게 쥐어 잡혀 살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성격이고, 소벡은 잘생긴 외모와 허풍으로 아버지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막내 이파는 눈치껏 아버지와 할머니 에사의 비위를 맞추며 집안을 물려받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 대가족의 일상은 아버지 임호테프가 아름답고 어린 첩 노프레트를 데리고 오면서 깨지기 시작하는데…….
세세한 거 제외하고 나면, 결국 돈 많은 부모와 그 재산으로 먹고 사는 자식들이 있는 집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이다. 이런 설정은 지난달에 읽은 ‘크리스마스 살인 Hercule Poirot's Christmas, 1938’이라든지 ‘벙어리
목격자 Dumb Witness, 1937’, ‘죽음과의 약속 Appointment with Devil, 1938’, 그리고 ‘삼나무 관 Sad
Cypress, 194 등이 있다.
하지만 기본 설정이 비슷하다고 해서 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건 아니다. 똑같은 배추로 같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김치 맛은 담글 때마다 조금씩 다른 법이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소설과 달리 사건 수사보다는, 겉으로는 화목해보이던 가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순하던 사람도 극한까지 몰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리고 선입견으로 사람을 대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등등의 가족 구성원의 심리와 행동 변화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거기다 레니센브를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아무래도 임호테프가 이집트 왕의 묘소를 지키는 승려이고, 사후 세계를 믿는 국가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또한 임호테프의 서기인 호리의 입을 통해서는 인간의 이중적인 면에 대해서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다.
호리는 가끔 아주 멋진 말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지식이 불완전할 때 무서움도 느끼는 법입니다. 다 알고 나면 무서움도 사라지지요.’
라든지 ‘마음이 옆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그 악한 마음은 옥수수 사이에 피어나는 양귀비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는 법입니다.’ 같은 말들이다. 자칫
잘못하면 중2병에 허세가 쩌는 걸로 보일 수도 있는데, 호리는 그런 부분은 잘 조절했다. 그러니 여자들이 의지하고 따라는 건 당연한 일.
뭐, 이번에도 호리와 레니센브의 러브러브가 나오긴 한다. 아, 레니센브는 호리 말고도 다른
남자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니, 양 손에 남자를 하나씩! 대단한 능력자다. 역시 여자는 예뻐야……. 아, 갑자기 눈에서 물이
나오네.
사람의 마음이란 정의하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 노프레트가 왜 임호테프의 가족들을 이간질시키려고
했는지는 명확히 모르겠지만, 조금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모스를 비롯한 소벡과 이피의 처지도 대충 생각할 수 있었다. 다들 불쌍한
존재였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경쟁자가 많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으며 그에 반비례해서 욕망은 너무도 컸다.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니 질투하고 증오할 수밖에…….
가족이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