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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ㅣ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원제 - Die
Henkerstochter, 2008
작가 - 올리퍼 푀치
30년 전쟁과 마녀 사냥이 한차례 휩쓸고 간 독일의 작은 마을 숀가우. 기껏해야 상권을 둘러싸고 이웃마을 아우크스부르크와의 다툼이 있는 게
다였던 조용하던 마을에 불길한 징조가 일어난다. 한 소년이 강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사고사로 여겨질 뻔했지만, 소년의 어깨에 문신처럼 찍힌
악마의 기호는 마을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어린 소년소녀와 잘 어울리던 마을 산파인 마르타를 마녀로 지목한다. 며칠 후, 그녀와
잘 놀던 또 다른 소년마저 시체로 발견되자,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설상가상으로 마을 창고가 불타는 날, 또 다른 소녀가
사라진다. 마을은 마녀와 악마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휩싸인다.
하지만 마을의 사형집행인인 퀴슬은 일련의 사건들이 마녀가 아닌, 인간이 저지른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의사의 아들인 지몬과 함께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책의 제목인 '사형집행인의 딸'은 막달레나 퀴슬을 가리킨다. 퀴슬의 딸이자, 지몬과 사랑에 빠진 귀여운 아가씨. 하지만 지몬은 의사의
아들이고, 그녀는 사형집행인의 딸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천민인 백정의 딸과 중인인 의관의 아들이 사귀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한국이건
독일이건 당연히 반대가 심하다. 특히 남자 집안에서. 하지만 막달레나는 예쁘고, 용기 있고, 그 당시 여자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글자를 읽을 줄
알며, 생각을 할 줄 안다. 어떻게 보면 지몬에게 주기 아까울 정도이다. 독자인 내가 이럴 정도니, 아버지인 퀴슬은 어떠할까?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내가 중세 독일의 농촌 마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퀴슬의 뒤를 따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흙탕 길을
뛰어다니고, 막달레나와 같이 약초를 캐고 있었으며, 그녀와 지몬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면서 '뽀뽀해!'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고문을
받아야하는 마르타를 만나면 안쓰러운 마음에 얼굴을 찡그렸고, 아이들을 죽이는 악마라 불리는 놈이 나오면 무서워 살짝 뒤로 숨으면서 속으로 욕을
했다. 대놓고 하면 칼맞을까봐. 그러다 어린 클라라와 조피가 놈에게 쫓길 때는 '빨리 뛰어!'를 외쳤고, 마을 사람들이 마르타를 죽이라고 난리
피울 때는 화를 냈다.
그 정도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마을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뛰어났다. 게다가 각각의 인물들이 상당히 개성적이어서, 그 생동감이 더했다.
그 때문에 책에 흠뻑 빠질 수가 있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첫문장이었다.
'10월 12일은 사람을 죽이기에 좋은
날이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너무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담하지만 앞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저 문장으로 시작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퀴슬의 집안은 대대로 죄인을 죽이는 사형집행인을 가업으로 이어왔다.
그런데 특이하게 죄인을 처형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죽인다는 표현을 썼다. 왜 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사형을 당하는 자들 중에 죄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뜻 같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야콥 퀴슬의 할아버지 대에 엄청난 마녀 사냥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무려 6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죽어나갔다. 그런데 그 중에 진짜 마녀는 없었다. 다들 사람들의 공포와 질투로 마녀로 만들어져 사형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죄인이라 지목된 사람에게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냈다. 마녀뿐만 아니라, 일반 범죄자들에게도 고문이 가해졌다. 과연 그 자백이 진짜일까?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바람에 죄를 저질렀다고 시인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죄인은 처형을 받는 죄인이 아니라, 누명을 쓴 무고한 사람이었다. 퀴슬은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죽인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시점에서 소설을 다시 보면,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는 사형집행인이나 고아, 마녀로 몰린 산파가 더
인간적이었다. 비록 가진 것 없지만, 그들은 서로를 위하고 도우며 의지하고 살았다.
자기들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해하며 질투하고 급기야 반감을 드러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드러내기 싫어서,
희생양을 골랐다. 자기들보다 약하거나, 자기들이 갖지 못한 뭔가를 가진 그런 사람을…….
숀가우의 많은 부인들은 마녀와 어울린 다른 마녀들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눈빛이 사악한
옆집 여자, 저쪽 뮌츠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남편의 뒤를 쫓아다닌 하녀…….
-p.326
얼마 전에 본 영화 '파라노만 Paranorman , 2012'이 떠올랐다. 남들과 달랐기에 따돌림을 당하고 급기야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어린
아이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무지했기에 아는 바가 없어서,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말하기 싫어서 모든 것을 악마와 마녀의 소행으로
돌렸다. 그리고 괜히 아는 척했다가 몰리기 싫어서, 좋은 게 좋은 거여서 동조를 하고 눈을 감았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를 희생하려 한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신분이 낮으며 자기들보다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아, 진짜
인간이란…….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더 다가온다. 그리고 과연 다수와 소수에 대한 문제를 다시금 고민하게 했다.
다수가 과연 100% 옳은 것인지, 매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면 과연 누가 남을 것인지, 다수가 양보해서 소수까지 살릴 수는 없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내가 중세에서 살고 있는지 21세기에 살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참 어렵다.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