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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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I am Legend, 1954년

  작가 - 리처드 매드슨



  이 소설은 암울하다.


  오직 주인공의 독백과 회상으로 이루어진 글은 그의 불안과 절망, 외로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그의 그런 감정들을 고스란히 공유하게 만든다. 그가 미쳐갈 때 독자도 불안해하고, 그가 희망을 품으면 같이 ‘어쩌면…….’하고 기대를 하게 되고, 그가 배신당해 절망감에 몸부림치면 ‘그럴 줄 알았어! 제길!’하고 화를 낸다.


  시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회상에서 추측해보건대 냉전이 한창 극에 치닫던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설이 처음 출판된 연도를 고려해보면, 그럴 것이다. 전쟁 발발과 핵의 사용.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쟁 시나리오는 그대로 일어나고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지구 환경, 사회 구조, 자원 기후 그리고 인간까지! 바이러스는 인간들을 흡혈귀로 바꾸어놓는다. 단 한 사람, 주인공 네빌만 빼고 말이다.


  말 그대로 지구 최후의 인간이 되어버린 네빌은 흡혈귀가 된 다른 인간들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동시에 고독과 싸워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낮에는 잠자고 있는 흡혈귀들을 죽이고, 밤에는 그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대비한 요새화된 집에서 머무른다. 그러면서 그는 바이러스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자가 발전기와 실험실까지 구비되어 있다.


  참고로 이 소설에서 나오는 흡혈귀의 특징은 참으로 독특하다. 브롬 스토커가 만들어낸 드라큘라의 특징을 가져온 듯 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꼭 심장을 말뚝으로 박지 않아도 된다거나, 과학적으로 흡혈귀들의 생태에 대해서 연구해놓은 부분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그런 존재가 되려면 그냥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굳이 물리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점에서는 좀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또 다르다. 사실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 역시 이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이건 좀비도 아니고 흡혈귀도 아닌 셈이다.


  흡혈귀는 전설에서만 나오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인간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존재였고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런 상황이 바뀐다. 흡혈귀들이 득실거리고 인간은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전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어쩌면 작가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킴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해보라는 도전장을 내민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타당한 진실들이 근본부터 뒤집혔을 때, 이 세상에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넌지시 묻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주인공 네빌처럼 전설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할 것인가.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 리뷰에서도 썼지만, 모두가 다 ‘네’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대답해서 다굴 당할 자신이 없기에, 다들 좀비가 되면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어쩌면 소설 속의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처음부터 반항 따위는 꿈도 안 꿀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누가 정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네빌은 인간인 자신이 정상이고 흡혈귀가 된 다른 이들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99.99%가 흡혈귀이고 0.01%만 인간일 경우에,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란 말인가? 과연 99.99%가 인간이 아닌 시점에서 0.01%를 위한 인간의 보편적 도덕 판단 기준이나 가치 기준이 적용되느냐의 문제이다. 이미 99.99%가 인간이 아닌 존재인데, 그들에게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 수 있냐는 것이다.


  개끼리의 싸움에서 상대 개를 죽이고 이긴 개에게 살견죄를 적용시켜서 무기 징역이나 사형을 시킬 수 있을까?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긴 놈에게 다른 사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인구 60억 중에서 59억이 동성애자이고 1억이 이성애자라면, 누가 정상이 되냐는 것이다.


  어쩌면 정상이라는 말이나 보편타당하다는 말은 소수를 배려하지 않는 다수의 횡포일 수도 있다. 소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비록 그 소수가 옳은 주장을 하더라도 다수의 의견이라는 이유로, 다수가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니 그것이 정상이고 타당하다는 구실을 붙이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는 다수 의결을 채택하는 제도이다.


  비록 소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 집단의 성향이 어떤 것이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잃는 순간,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순간, 민주주의는 다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무리들, 그러니까 정치 협잡꾼들 내지는 이권 단체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다수니까 옳다는 생각으로 아무 비판 없이 정부나 언론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는 국민들은 소설에서 나오는 흡혈귀 내지는 로메로 영화의 좀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그것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그들을 뽑아준 국민이 아닌, 그들을 공천해준 정당의 노예이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켜본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대변한다고 겉으로는 외치지만, 결국은 정당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전락하는 것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온 일이다.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되니까. 인간은 어쩌면 과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선천적으로 망각의 동물인지라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를 하는 것이다.


  다수니까 옳다. 다수니까 정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나 맞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작가는 소설에서 말하려고 한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싫어한다. 거기에는 철학이나 생각은 하나도 없고, 액션과 특수효과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그딴 식으로 만들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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