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Destination Unknown, 1954
작가 - 아가사 크리스티
이번 편은 크리스티가 배출한 탐정이 나오지 않는, 첩보물이다. 그렇다고 1,2차 대전의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 자본과 대결하는 내용이다. 음, 크리스티는 이미 50년대에 거대 자본의 폐해를 예상했다. 역시 뛰어난 작가!
세계 여러 나라의 유능한 과학자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중에는 사고로 죽는 사람도 있지만, 첩보부에서는 사고사를 위장한 실종으로 보고 있다. 한편 아들을 잃고 남편과 헤어진 힐러리는 죽겠다는 일념으로 카사블랑카로 향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첩보원 제솝이 제안을 하나 한다. 사라진 과학자의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는데, 그 행세를 해달라는 것이다. 이왕 죽을 거면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나 하고 죽으라는 그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린 힐러리. 은밀히 접촉해오는 국제 조직을 따라 아무도 모르는 폐쇄공간으로 향한다.
이번 편은 무척이나 진지한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예를 들면 우연히 사건에 휘말린 남녀가 나오는 소설들을 보면 로맨스가 주를 이루고 가끔 장난기 가득한 상황이나 대사가 나오는데 이번은 그러지 않았다. 다른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될까 두근거리면서 적극적으로 사건에 몰입하지만, 힐러리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기대라든지 설레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삶을 포기한 상태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비밀 조직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라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누군가 다가와도 그것을 호의로 보기보다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고민한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열변을 토한다. 대개 천재적인 과학자들이라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우매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적인 자신들의 모든 권력을 잡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병신 같지만, 뇌를 비우고 읽으면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론 정신을 차리면 '이건 또 무슨 바보인증이야.'라며 혀를 차게 된다.
중간에 과학자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데, 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여자를 너무 수동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어쩌면 2차 대전 후, 늘어난 여성들의 사회 참여에 대한 남자들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남자들만의 세계에 뛰어들어 독하게 살아야하는 여자 과학자의 모습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950년대나 지금이나, 그 생각이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60년이면 강산은 몰라볼 정도로 6번이나 바뀌지만, 두 세대를 지나는 인간의 생각은 별로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뭐, 크리스티의 작품답게 결말에서는 로맨스가 완성되기도 한다. 왜 갑자기 둘이 사랑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생면부지의 남녀를 사랑에 빠지게 하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나보다. 아, 그래서 애인님이 두 번째 데이트 때 대구에 있는 흔들다리를 밤에 건너자고 했나. 그 때 너무 무서워서 울면서 주저앉았었는데, 그런 거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