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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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堅硬如水 (2001년)

  작가 - 옌롄커 (閻連科)


  책을 처음 보고는 '두껍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650쪽에 달하는 소설이라니! 간만에 며칠 잡고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책을 한 번 잡자,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중간에 긴장이 되거나 식사 시간이라 몇 번 눈을 뗀 적은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꼬박 앉아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목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물이 단단하던가? 단단한 건 금속이나 돌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고 책을 펼쳤다.


  책은 주인공인 가오아이쥔이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일까? 어떤 부분에서는 표현이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말을 다른 형식으로 되풀이하기도 한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얘기할 때나 그녀와 사랑을 속삭일 때는 더욱 더 심하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남자이고, 또 다르게 보면 상당히 말 많은 남자일 수도 있고 또는 표현력이 풍부한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청년일지도 모른다.


  야망 있는 남자인 가오아이쥔은 자신의 딸과 결혼하면 간부를 시켜주겠다는 지부 서기의 말에 혹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구이즈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군에 입대한다. 부부라고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그냥 필요에 의한 것일 뿐 애정 따위는 없었다.


  제대를 앞둔 그는 길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난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관계를 맺기 바로 직전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 서로에 대한 깊은 인상만 간직하고 이름도 모르고 헤어진다. 하지만 그에게 그 여인은 첫사랑과 같았다.


  제대 후, 고향 마을에 혁명 사상을 퍼트려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가오아이쥔. 하지만 장인은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그에게 간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 구이즈는 그의 어머니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집안의 실권을 쥐고 흔든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두 아이는 그를 처음에는 무서워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더욱 더 혁명을 해서 간부를 해야겠다는 욕망을 불태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음에 간직했던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샤홍메이로, 그의 동창과 결혼한 몸이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그녀 역시 혁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혁명 동지로 몸과 마음을 합쳐, 마을을 개혁하기로 마음먹는다. 비록 그들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 장인이나 시아버지이지만, 거리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혁명으로 맺어진 동지였으니까.


  주인공의 부인이 목을 매어 자살한 이후, 둘의 사이는 갈수록 깊어진다. 그리고 마을을 바꾸려는 혁명에도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언제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는 법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건 불륜의 미화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마음에도 없는 결혼이었고, 서로를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들도 떳떳하지 못한 것을 알기에 남몰래 만나지 않았던가. 지하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든 둘은, 그곳에서 마음껏 쾌락을 즐겼다. 밖에서는 혁명 동지였지만, 안에서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시련이 있어야 사랑이 더 빛난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이 두 사람은 현실 도피적인 관계라고도 보이니까. 어쩌면 그 당시는 이혼이라는 게 절대로 허용이 안 되던 때였을지도 모른다.


  문득 두 사람이 혁명에 열성적으로 모든 것을 바쳤던 이유가 진짜로 혁명이 일생일대 최대의 목표여서였는지, 아니면 분위기에 들뜬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폼을 잡았고, 그녀는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좋아 보이고 같이 있고 싶어서 동참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두 사람의 감정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강렬해지고 열성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혁명에 둘 다 관심은 있었다. 책을 보면 두 사람 다 혁명에 관한 책에 나오는 구절을 줄줄 외우면서 게임까지 할 정도니까. 그들에게 그것은 섹스를 하기 위한 전희와도 같았다. 마오 주석의 사진 앞에서 혁명가를 들으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그들에게 혁명은 섹스와 비슷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섹스 그 자체가 혁명일지도 몰랐다. 기존의 것을 뒤엎는 것을 혁명이라고 본다면, 강압에 의한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를 부정하는 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직 자손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성관계를 인정한 그 시대의 풍조를 거부하고,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즐기기 위한 성관계를 추구한 것도 혁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말은 인과응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타인에게 했던 짓을 고스란히 되받았으니 말이다. 남에게 쳤던 올가미가 고스란히 자기들의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어이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렇다면 혁명이란 얼마나 덧없는 열병과도 같고, 한번 잘못 디디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모래 지옥 같은지…….


  제목에 대해 생각해봤다. 물이라고 했지만, 단어의 뜻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개 물은 생명의 원천을 뜻한다. 또한 사람의 희망 내지는 꿈도 역시 살아갈 힘을 준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감정 역시 살아갈 계기를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혁명은 두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을 건설하는 목표였고,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끝까지 버티고 살아갈 힘을 주었다.


  물은 그런 의미로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물처럼 단단하게라는 말은, 사랑과 목표를 갖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뜻하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념과 꿈에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런 인생.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륜은 불륜이다. 이건 어쩌면 숲을 보라고 했더니 손가락만 보는 격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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