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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속의 살인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2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원제 - Murder in Retrospect, 1943
작가 - 애거서 크리스티
이상한 일이다. 이 책, 그러니까 해문 출판사에서 나온 'Agatha Christie Myster에서는 제목이 '회상 속의 살인'이고, 영제는' Murder in Retrospect'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제목은 '다섯 마리 아기 돼지'이고, 영제는 'Five Little Pigs'라고 적혀있다. 그렇다고 크리스티가 한 개의 이야기를 두 개의 제목으로 책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찌되었던 난 해문 출판사 버전으로 읽고 있으니, 제목은 '회상 속의 살인'이고, 영제는' Murder in Retrospect'라고 하겠다.
포와로에게 한 아가씨가 찾아온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을 둔 그녀는 포와로에게 16년 전의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에 병사한 어머니의 결백을 밝혀달라는 의뢰였다. 그녀가 어머니를 무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죽기 전에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결백을 주장하는 편지 한 장이다.
에이미어스 칼라일. 천재 화가였지만, 여자관계가 문란하기로 유명했다. 모델을 섰던 여자들과 사랑에 빠지지만, 작품 활동이 끝나면 가차 없이 그녀들과 관계를 끊어왔다. 그런데 죽기 직전까지 함께 했던 모델 엘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캐롤라인과 이혼을 하고, 그녀와 결혼까지 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한 부인이 그를 독살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포와로는 사건 관계자, 그 가족과 가까웠던 친구들, 캐롤라인의 동생, 그리고 모델이었던 엘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사건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기록해주길 부탁한다. 그리고 마침내 1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데…….
미국 드라마 중에 '콜드 케이스 Cold Case'라는 것이 있다. 미해결 처리된 과거 사건을 재수사하는 내용인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와, 사람들 기억력 대박! 머리 짱 좋아!'라고 감탄을 했었다. 사실 내용보다는 주인공인 릴리 형사 때문에 보았다. 하아, 그녀의 그 상큼한 미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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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도 그러했다. 16년 전에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일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정도로 중요했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고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음, 난 그렇게 명확하게 떠오르는 과거 기억이 없다. 아니, 과거를 기억 못한다는 게 아니라 그들처럼 누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다고 기억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 없었다는 걸까? 아니면 기억해봐야지라고 노력했던 일이 정작 별로였다는 걸까? 하긴 그러고 보니 애인님에게 사귀자고 고백했을 때의 일은 정확히는 아니지만 얼추 기억이 나긴 한다. 아, 내가 바보는 아니구나.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던 건, 관련자들이 말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누구는 캐롤라인을 멋진 여성으로, 또 누구는 악녀로 표현했다. 그리고 다른 이는 칼라일을 좋게 보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아마 사람마다 느끼는 개인적인 호불호라든지 입장 등등이 사실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한 모양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 와중에 진실을 파헤친 포와로에게는 '대박! 짱!'이라는 감탄사를 보낸다. 칭찬에 넘어가서 사건을 맡은 건 좀 재미있었지만. 음, 생각해보니 그는 젊은 여성의 칭찬에 약하다. 그러면서 매번 헤이스팅즈에게 붉은 기가 도는 금발에 약하다고 뭐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칼라일이 나쁜 놈이다. 모델과 사랑을 나누어야만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그래서 모델이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놓고 그림이 완성되면 뻥 차버리다니! 나중에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지만, 남편이 매번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는 걸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지. 칼라일은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하다는 건 아니지만…….
살아남은 어린 딸, 그러니까 포와로에게 사건을 의뢰한 아가씨만 불쌍한 이야기였다. 부모도 그렇고 주위 친척들도 그렇고 도대체 왜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은 걸까? 가장 보호받아야 할 어린 아이였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참……. 뒷맛이 씁쓸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