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Peril at End House,
1932년
작가 - 애거서 크리스티
헤이스팅즈와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러 콘월 해안으로 온 포와로. 정부의 사건의뢰조차 거절하고 쉬는 그의 앞에 한 여성이 등장한다. 닉 버클리,
무너져가는 가문의 후계로 살인 위협을 받고 있다는 하지만 그녀의 지인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녀는 거짓말쟁이 닉이니까. 하지만
포와로는 그녀를 노렸던 총알을 발견하고,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축제가 열리던 밤, 닉의 사촌인 매기가 살해당한다. 닉이 걸치고 있던 숄을 두른 채로. 거기다 요양원으로 대피시킨 닉에게 치사량에 달하는 마약이
담긴 초콜릿이 배달되고, 설상가상으로 닉의 비밀 약혼자가 엄청난 재산을 남겨두고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단순 치정인가 아니면 막대한 돈이
목적인가? 포와로의 회색빛 두뇌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시 포와로가 나오는 시리즈는 헤이스팅즈와 티격태격하면서 추리하는 이야기가 재미나다. 포와로는 헤이스팅즈에게 머리를 쓰라고 구박을 하고,
헤이스팅즈는 포와로가 너무 잘난척한다고 분개한다. 어떻게 보면 사이가 나빠서 으르렁대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포와로는
헤이스팅즈에게 부탁을 했으니까. 자기가 너무 잘난척하는 것 같으면 ‘초콜릿 상자’라고 말 한마디만 해달라고 말이다.
아, 이 둘은 너무도 친해서 상대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구박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같이 다닐 이유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헤이스팅즈는 자기도 모르게 포와로에게 사건 해결을 위한 힌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이 포와로에게 빛을 주기도
하니까. 어쩌면 포와로가 머리를 쓰라고 구박하는 건, 그의 직관력이나 탐정에게 필요한 자질들을 썩히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이번 이야기에도 약이 섞인 초컬릿 상자가 등장하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두 번이나 초콜릿에 당한 포와로가 불쌍하기도 하고, ‘다행이야, 이
남자도 인간이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도 느끼고. 그런데 왜 안도감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의 감정의 온도는 도대체 몇 도인지 궁금하다. 가까웠던 사람을 고의적으로 위험에 빠뜨리고
심지어 죽일 정도면, 그 피해자는 살인범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였을까? 자신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신뢰와 사랑을 보내줬던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애정을 바칠 때, 범인은 차가운 마음으로 가식적인 미소를 보여줬던 걸까?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게 어찌 보면 일방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진심으로 대하지만 상대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면 좋을 텐데…….
깨알 같은 크리스티 님의 작품 홍보도 빠지지 않았다. 첫 장부터 푸른 열차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생각하는 포와로의 입을 빌어, 4년 전에
나왔던 ‘푸른 열차의 죽음 The Mystery of the Blue Train, 1928’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p.208쪽에서는 호박
재배를 얘기하면서 ‘에크로이드 살인 사건 The Murder of Roger Ackroyd, 1926)까지. 읽으면서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 시리즈의 설정은 참으로 잘 잡혀있다는 감탄도 했다. 하긴 그러니까 그토록 많은 글을 오랜 시간 동안 연재할 수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