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작가 - 누마타 마호카루
아, 이렇게 후유증이 심한 책은 간만이었다. 읽은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가슴은 먹먹하고 머리는 지끈거리기만 하다.
눈을 가린 너무도 연학해 보이는 소녀와 커다란 꽃 한 송이. 그런데 그 꽃잎에는 혈관이 퍼져있다. 표지부터 어딘지 모르게 피가 연상된다.
글은 피가 튀기고 살점이 잘리지는 않는다. 육체적인 고문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글보다 몇 백배는 더 잔인하고 끔찍했다. 얽히고설키다 못해 배배꼬인 인간관계도 그렇고, 그 사이에서 더없이 복잡한 심리가 읽는 내내 날 지치게 했다. 게다가 이 글을 쓰려니 며칠 전의 감정을 되살아나, 힘이 들 정도니까.
어디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잘못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디서부터, 누구로부터 그들의 운명이 엉망이 된 걸까? 자신만이 그녀를 지킬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고 믿은 의사? 어찌 보면 가장 상처를 받았다고 울면서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그녀?
이 글에는 두 명의 엄마가 나온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 후미히코와 단 둘이 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엄마지만 남몰래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사치코. 어느 날 사라진 아들과 갑작스레 사고로 죽은 비밀 애인 때문에 그녀의 일상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엄마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그래서 불안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아사미. 그녀를 보는 순간, 난 이토 준지의 만화 캐릭터 토미에를 떠올렸다. 주위에 남자들을 끌어 모으는 마력이 있는 여자. 그래서 남자를 미치게 하고, 자기마저 상처 입는 여자.
그리고 한 명의 소녀. 아사미의 딸로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후유코. 엄마의 마력을 이어받았지만, 순수하고 너무도 여렸던. 그래서 더 많이 상처받고, 그것을 숨기려고 강한 척 연기를 해야 했던 소녀.
막장 드라마의 공식을 그대로 가져온 느낌의 설정에 다소 반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자신의 환자였던 여자를 지키기 위해 아들과 부인을 버린 아버지. 그 여자의 딸과 친구인 남자와 관계를 맺는 어머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풋풋한 짝사랑이 서서히 소름끼치는 집착과 광기로 변해버린 소녀.
배려가 비밀을 만들고, 비밀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뒤틀린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그 반발이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가슴 아프고 저릿했다. 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장난 식으로 이 글의 교훈은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지인에게 말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도 맞을 것 같다.
그래, 찾아냈다. 이 사람들의 운명이 엉망으로 된 것은, 바로 성폭행 범들 때문이다. 잠깐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하반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부릴 자격도 없는 것들. 그들은 한 여자의 인생만 망친 것이 아니다. 그녀와 관련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문제는 그 빌어먹을 놈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