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제 - WHISPERING CORRIDORS 6 : THE HUMMING, 2020
감독 - 이미영
출연 - 김서형, 김현수, 최리, 비비, 권해효
‘은희’는 모교의 교감으로 부임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잃고,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있었다. 어쩐지 그녀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상담실을 맡게 된 은희에게 한 학생이 찾아온다. ‘하영’이라는 학생은 학교의 인기인인 담임 ‘박연묵’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얘기한다. 하지만 박 선생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은 하영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이에 하영은 엇나가기 시작하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 3층의 폐쇄 지역으로 향한다. 은희 역시 하영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 아앗! 풍년이다, 풍년! 스포일러 풍년!
‘여고 괴담 女高怪談, Whispering Corridors, 1998’이 처음 나왔을 때, ‘오오!’와 ‘으악!’ 하면서 재미있게 보았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내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영화의 공포가 더 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후 2편과 3편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4편은 대략적인 이야기와 몇몇 장면들만 떠오를 뿐이고, 5편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전작을 능가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못한다는 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법칙인 모양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6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전작보다 못하지만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학생들은 주로 신인으로 뽑기 때문에, 연기력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책 읽는 수준에서만 벗어나면 다행일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 기대하지 않았다. 전혀. 네버. 결단코.
하지만 영화는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처참했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좋은 쪽으로 감탄하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이 정도로 형편없는 망작을) 이렇게 (감히 여고괴담 시리즈라고) 만들 수 있지?’라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여고괴담 시리즈가 4편부터 망작의 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건 진짜, 하아…….
자, 이제 위에 언급한 스포일러 풍년이 뭔지 보여주겠다.
이 작품에서 하영과 은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친구가 3층의 폐쇄된 전직 화장실 현직 창고에서 죽었고,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학교에 의해 그 사실을 은폐 당했다. 하영은 교장에 의해, 은희는 그 시절 담임이었던 현 교장에게 말이다. 이렇게 보면, 괴담이 만들어지고 귀신이 등장할 조건은 충분하다. 거기다 자신들의 피해를 외면하고 가해자를 편들어준 학교 관계자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조건으로 이야기를 잘 다듬으면, 망작이라는 평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가해자를 밝히는 과정에 있었다.
하영을 성폭행한 사람은 담임이었다. 이사장의 조카이자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미혼의 남자 선생. 그는 자신이 맡은 반의 아이 몇 명을 격려를 핑계로 집으로 불러 술을 먹이고 강간을 하며 그 장면을 촬영까지 한다. 이후 그걸 빌미로 아이들을 계속해서 농락하고 말이다. 이건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도 생길 수 있고, 다른 친구에게 말 못 할 비밀을 만들게 되면서 오해를 사고 거리가 멀어지는 등등의 일이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은희를 성폭행한 사람은 너무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경이 되는 학교는 광주에 있고, 마침 군인들이 와 있었다. 그렇다. 광주 민주화 항쟁 때, 광주를 진압하러 온 군인이 바로 은희를 성폭행한 사람이었다. 그럴 수 있다. 그 당시 광주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건이 밝혀지는 게, 너무 갑작스럽다는 느낌이다. 내가 그 당시를 잘 몰라서 뭐라고 못하겠지만, 군인들이 광주로 오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가 너무 평화로웠다. 노래 연습하겠다고 여학생 두 명만 학교에 남는 게 가능한가? 당직 선생도 아무도 없이, 경비 하나만 있는 게? 차라리 선생들이 다 광주 시청으로 갔다면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얘기는 없었다. 나오는 선생이라고는, 살아남은 은희에게 학교의 명예를 위해 입 다물라고 강요하는 사람뿐이었다.
도대체 왜 군인 두 명이 군용 트럭을 몰고 학교에, 그것도 여학교에 왔으며, 왜 아이들을 강간하고 끌고 갔는지 모르겠다. 겨우 그 짓을 하려고 왔다면, 왜 길에 있던 다른 아이들은 가만히 내버려 뒀을까? 두 명을 공격하나 네 명을 공격하나, 그들에게는 총이 있었으니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군인들이 그곳에 있었고, 왜 아이들을 공격하고 끌고 갔는지 말이다.
너무 뜬금없는 등장이었고 이상한 전개였다. 그럴 거면 그런 분위기라도 미리 잡아두던가. 영화 초중반에 은희가 군인을 보고 거의 쓰러질 듯이 더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힌트였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건 굳이 광주라는 설정을 넣지 않아도 되는 장면이었다. 군인이나 선생이나 다 똑같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학생들을 강제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면 진짜 광주가 아니어도 되는 거였잖아? 고등학교 때 군복 입은 사촌오빠나 친구 오빠 내지는 옆집 오빠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막말로 이런 식으로 광주를 팔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몇몇 외국 작품 중에, 현재의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과거의 역사적 비극을 다시 일깨우는 내용이 있기는 했다. ‘구울 Ghoul, 2015’이라든지 ‘체르노빌 다이어리 Chernobyl Diaries, 2012’ 같은 영화가 있었다. 이 작품도 그런 식으로 만들려고 한 거 같은데, 그러기엔 방향을 잘못 잡았다. 잘못 잡아도 너무 잘못 잡았다. 이런 식의 접근은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광주와 군인을 삭제하는 편이 나았다. 그냥 학교 이사장 내지는 교장 또는 그 가족이 은희를 성폭행하고 그걸 학교 차원에서 입막음했다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교장이나 이사장의 조카가 아이들을 노리개 삼고 있다는 게 더 개연성 있지 않을까? 현 교장은 이사장 집안의 치부를 숨겨줘서 승진한 것이고 말이다. 그게 더 학교를 둘러싼 공포를 다루는 여고 괴담이라는 시리즈의 목적에도 어울렸을 것이다.
여고 괴담이 인기 있었던 건, 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소재를 다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게 아니었다. 선생에 의한 성희롱이나 차별은 학교 다닐 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학교에서 군인에 의해 강간당하는 건 극히 드문 경우니까 말이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박수받아야 할 건, 주연을 맡은 김서형의 연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