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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 - Woman of Fire 火女, 1971
감독 - 김기영
출연 - 윤여정, 남궁원, 전계현, 최무룡
‘명자’는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를 돌로 내려쳐 다치게 하고 친구인 ‘경희’와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다. 거기서 그녀는 양계장을 하는 ‘정숙’의 눈에 띈다. 정숙은 월급을 주는 대신 좋은 집에 시집보내주는 조건으로 명자를 고용하다. 명자는 그 말을 굳게 믿으며 양계장 일과 가정부 일을 해낸다. 정숙의 남편인 ‘동식’은 작곡가로 일하며, 가수 지망생들과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숙이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간 날, 술에 취한 동식은 명자를 강간한다. 이후 명자는 임신을 하고, 동식은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정숙은 남편을 탓하면서 명자의 아이를 낙태시킨다. 강간과 임신과 낙태,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좋은 집에 시집가는 게 무산되었다는 사실에 명자는 이성을 잃는데…….
영화를 보면서 기본 설정이나 흐름, 그리고 몇몇 장면이 낯이 익었다. 아, 그렇다. ‘하녀 The Housemaid, 下女, 1960’를 만든 감독이었다. 그러니까 음, 자기 복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음악을 하는 남편과 그 아내 그리고 하녀의 삼각관계를 60년대와 70년대의 각 특징에 맞춰 리메이크했다고 해야 할까?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아내의 변화가 제일 크다. ‘하녀’에서는 경제권 없이 그냥 남편에게 순종하며 다소곳한 이미지였는데, ‘화녀’에서는 가정의 경제권을 쥐고 남편에게 화도 내고 할 말 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10년이라는 시간 속에, 강산만 변한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여성상도 많이 바뀐 모양이다. 이 영화에서 아내인 정숙은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그의 바람기를 의심하고, 남편의 배신에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남편은, 전작보다 더 쓰레기로 나온다. 아니,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중에 쓰레기가 아닌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아니, 아니, 그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건 쓰레기한테 미안한 일이다.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몇 가지 적어봤는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포기. 어휘력이 부족하다…….
하여간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이 작품은 강도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한 남자와, 살해당한 피해자의 부인이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인 하녀의 친구 경희가 역시 참고인 조사를 위해 경찰서로 찾아온다. 그런데! 여기서 형사가 말인지 똥인지 모를, 개쓰레기 같은(쓰레기야 미안해), 직업 차별적이면서 혐오로 가득 찬 대사를 내뱉는다. 처음부터 영화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작품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술집에서 일하는 경희를 어떻게 해보려는 남자 손님이나 바텐더의 대사도 그렇고, 명자와 경희가 방문했던 직업 소개소장의 짓거리도 그렇고, 어떻게 등장한 남자들의 행동이나 대사가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뭐, 그 당시에는 저런 대사가 용인되었던 시절이니까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 시대였으니까……. 아, 그래도 싫다.
‘하녀’에서는 하녀와 아내의 대립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하녀의 독주였다면, ‘화녀’는 달랐다. 명자와 정숙, 두 사람의 대립은 첨예했고 눈에서 불꽃이 튈 정도였다. 사실 처음에 두 사람의 화목한 모습에 동식 따위 갖다 버리고 둘이 알콩달콩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시골 처녀와 그런 그녀를 도닥이며 도시의 삶을 알려주는 마나님의 관계도 괜찮을 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시골 아가씨의 순진함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합쳐지면서 똘끼를 넘어선 광기로 변했다. 전작에서는 주인집 아들을 계단에서 밀어 죽였는데, 여기서는 아기를……. ‘내 아기는 죽였으면서!’라는 절규가 참 안타까우면서 오싹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세상 물정을 알려주던 마나님의 차분함과 친절함은 독을 품은 기만과 냉철함을 넘어선 냉혈한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만약 정숙이 동식을 죽인다고 해도 하나도 놀랍지 않고, 도리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할 거 같았다. 아, 진짜 그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동식은 죽여버리고 명자와 정숙 둘이 행복하게 아이들 키우면서 사는 결말도 괜찮지 않았을까……. 흐음, 나 GL 좋아했나?
이 작품 ‘화녀’는 80년대에도 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영화는 80년대의 특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