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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 배명훈
스승인 ‘문 박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조은수’는 박사의 연구 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문 박사는 고고심령학계의 대가였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연구에 집중하는 걸 즐겼다. 그래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별로 없지만, 학계에서 박사를 빼놓고는 고고심령학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안개 낀 새벽마다 서울에 거대한 검은 성벽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괴현상이 일어난다. 카메라에 찍히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았고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성벽이 나타난 날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는 기현상까지 일어난다. 은수는 동료인 ‘김은경’과 문 박사의 지인인 ‘파키노티 박사’와 함께, 이 현상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장벽은 왜 나타나고, 사람들은 왜 죽어 나가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지만, ‘고고심령학’이라는 학문은 없다. 작가가 고고학과 심령학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창작의 산물이다. 시간적 배경이 현대이고 사건이 벌어지는 서울역이나 용산 같은 장소는 실제 있는 곳이긴 하지만, 현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고고심령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려면, 귀신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인정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이용해 고고학적인 연구를 하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나온다. 그래서 고고심령학과에 처음 입학하면, 오래전에 살았던 어린아이의 유령을 만나는 게 통과의례였다. 그리고 그 학과에는, 주기적으로 조은수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입학한다. 이 대목에서는 ‘온다 리쿠’의 소설 ‘여섯 번째 사요코 六番目の小夜子’가 떠올랐다. 물론 조은수와 사요코 두 존재의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이 책에서는 고고심령학이라는 말 외에도, ‘요새빙의 要塞憑依’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단어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서,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다. 읽다 보면 ‘아, 이런 의미구나’라고 짐작이 가는데, 사실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엄청난 대재앙이 벌어진다는 것 정도만 추측할 뿐이다. 이 책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단어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유령이 존재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보면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그냥 내가 그 세계에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진다. 아, 그래서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걸까?
책은 나라별로 다른 장기 규칙과 구전 동요에 관한 학문적인 토론이 나와서. 얼핏 보면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읽다 보면, 그런 처음 생각은 싹 사라진다. 대신 코끼리와 소년의 우정과 집착, 약속에 집중하게 된다. 아,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코끼리 쇼 같은 건 사라져야 한다는 거였다. 이 지구상에서 상아 때문에 사냥당하고 서커스에서 고통받는 코끼리 없게 해주세요! 이런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초반의 우려와 달리, 중후반으로 갈수록 눈을 뗄 수 없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