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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ㅣ 이타카
하지은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 하지은
한적한 소도시 레드포드의 롤랑 거리 6번가에는 7층 저택이 있다. ‘보이드’라는 이름의 주인이 7층에서 살고 있지만,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입주민들은 각자의 사연을 비밀로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다. 하지만 3층에 사는 ‘라벨’이라는 청년은 모든 사람에게 사근사근하고 친절하게 대해 인기가 높다. 그를 중심으로, 미로 공작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각 층의 입주민들에게 기이한 일이 닥치는데…….
이 작품은 현관에서 일어난 3층의 라벨과 6층의 ‘주스트’가 나눈 간단한 대화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초대를 받은 것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한 층씩 차근차근 올라가면서 각 입주민의 사연을 들려준다.
1층 걸작의 방에는 박제를 만드는 ‘스타프’가 산다. 그는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2층 시인의 방에 사는 ‘단트’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무작정 도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생각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3층 연인의 방에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도피를 한 남녀가 살고 있다. 그들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진 건,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4층 부정의 방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아버지의 정을 뜻하는 부정과 아니라는 의미의 부정이다. 귀족을 죽인 아버지 때문에 승진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 경찰 ‘루서’. 그러던 어느 날, 고위층에서 그녀에게 사건을 하나 맡긴다. 5층 여인의 방은 아이들을 다 출가시키고 혼자 사는 ‘오드리’ 부인이 살고 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6층 의사의 방은 오래전에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는 의사 주스트가 산다. 그는 우연히 라벨의 비밀에 관해 알게 된다.
라벨의 비밀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까 패스하고, 뒤표지에 적힌 걸 고려해서 말하자면, 그는 다른 이의 소원을 딱 한 번 들어줄 수 있다. 여기까지 들으면, ‘우와! 개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니, 라벨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한 말을 소원으로 받아들이고 이뤄주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러니 소원을 빈 사람은 자기가 소원을 빌었는지 모르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소원을 들어주는 건지……. 막말로 라벨을 만난 당시 내가 변비로 시달리고 있어서 ‘쾌변 좀 봤으면 좋겠네.’라고 말했으면, 그게 내 소원이다. 사람들이 다 알면 누구나 찾아와서 소원을 들어달라고 난리를 피울 테니 비밀로 했겠지만, 음…….
각각의 이야기는 다양한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에 관한 사랑, 열병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지고 후회만 남는 사랑, 가랑비처럼 서서히 젖어 드는 사랑, 오랜 친구 사이의 사랑, 자식을 보호하고 싶은 부모의 사랑, 애증이 집착이 되어 파멸로 가버린 사랑 그리고 잊지 못할 첫사랑까지. 그 다양한 사랑의 끝이 행복인지 아니면 불행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라벨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결국 선택하는 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라벨이 도와준다는 걸 알면, 다른 방식으로 소원을 빌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약간은 몽환적인 서술이 곁들여지면서, 각각의 이야기들은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어쩌면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더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에 입주할 때,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