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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데이먼 영 지음, 서정아 옮김 / 이론과실천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제 - Philosophy in the Garden, 2012년
저자 – 데이먼 영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을 착각했다. 원래는 ‘철학을 만나다’인데 ‘철학자를 만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차를 읽고는, 왜 작가들만 잔뜩 있을까 의아해했었다. 작가 중에 철학적 생각으로 책을 쓴 사람만 모아둔 걸까? 그런데 작가 중에 자신만의 철학 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중에 제목을 제대로 알고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다른 사람에겐 말을 안 해서 다행이었다.
이 책은 열 한 명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선정한 이유는 단 하나, 제목에도 나와 있지만, 자신만의 정원을 가꾼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정원이라고 하지만, 땅보다는 분재를 아낀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니까 자연을 사랑하고 식물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던 작가들이라고 해야 할까?
시골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사색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고, 그럴 때만 글을 쓸 수 있었던 ‘제인 오스틴’. 그녀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변화하는 정원을 보며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동시에 신앙으로 위안을 얻었다. 그녀의 작품에 넓은 정원이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침실에 분재를 놓고, 그것을 지켜보는 걸 즐겼다는 ‘마르셀 프루스트’. 비록 분재에는 나무 한 그루만이 있지만, 그를 그걸 통해 숲을 상상했다고 한다. 또한, 그에게 분재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관찰의 대상이고 동시에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체였다고 한다. 몽크스 하우스에서 묵묵히 정원을 가꿨던 ‘레너드 울프’.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그는 폭력과 야만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그에게 정원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이자, 인간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직접 정원을 가꿨다기보다는, 정원에서 산책하며 사색하기를 즐겼다. ‘생각 나무’라 이름 붙인 레몬 나무숲은 휴식처가 아닌,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과감한 도전 공간이었다.
‘콜레트’는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작가다. 잦은 스캔들, 과감한 작품 내용에 따른 악평과 인간관계에 관한 실망감을 정원의 꽃들로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변덕스럽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꽃은, 그녀의 욕망을 잠재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장 자크 루소’에게 정원은 바쁜 삶에서 숨을 돌리고, 최상의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원예학과 식물학을 통해, 그는 관찰하고 분석하며 묘사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조지 오웰’은 ‘주라 섬’에서 낫을 들고 땅을 고르며 정원을 가꿨다. 그에게 정원은 실험실이었고 지식의 보고였다. 농작물이 생각대로 자라지 않기에, 그는 가설과 검증 그리고 사실로 드러나는 과정을 중시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거의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녀는 화초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불교와 일본 정원에 매료되었다. 그는 돌과 나무, 연못의 조화를 통해 쉼 없는 혁신을 꿈꿨다. 창조와 파괴, 제작과 변형을 자극제 삼아 더 충만한 삶을 추구했다.
각자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다. 어떤 이는 실존과 존재를, 또 어떤 이는 종교적 위안을, 또 다른 어떤 이는 변치 않는 뭔가를 찾아내고 갈구했다. 하여간 그들은 정원 가꾸기를 통해 자신과 사회, 그리고 세상에 관해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그들의 저서이고 말이다.
문득 요즘 쓰는 감상문이 예전처럼 재미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는 시간이 전보다 줄어드는 대신, 넋 놓고 유튜브 방송 보는 시간은 늘었고 말이다. 나에게도 정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흙만 지는 것도 싫고, 땅에서 나오는 벌레도 싫어하니까 정원은커녕 화분도 소용이 없을 거야,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