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자 – 백세희
몇 년 전에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사람은 떡볶이를 좋아하는구나. 나 같으면 치킨을 먹고 싶다고 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왜 저자는 죽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쩌면 치열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뭔가에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건 아닐까 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아마 저자에게는 그 뭔가가 떡볶이였을 거로 추측했다. 그리고 그 당시 젊은 청년들에게 무리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에세이가 꽤 많이 나와, 그런 류일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책을 고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과거의 그런 추측과는 조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저자가 우울증 때문에 의사와 상담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었다. 한 주제에 관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면, 저자의 간단한 생각이 한 페이지 분량으로 붙어있다. 그리고 본편이 끝나면, ‘우울의 순기능’이라는 제목으로, 저자가 생각한 여러 가지 것들이 수록되었다.
그 때문에 본편을 처음 펼쳤을 때, 과연 이게 진짜로 의사와 상담한 내용인지 의아했다. 의사는 환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함부로 알릴 수 없는데, 환자는 그래도 되나? 자신에 관련된 기록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밝혀도 되는 건가? 설마 상담의 형식을 빌린, 저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의문은 저자와 직접 상담을 한 의사가 쓴 후기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폐기되었다. 그렇다는 건, 허락을 받으면 자신의 상담 내용을 녹음하고 그걸 외부에 공표해도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뭐, 그건 담당 의사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책에서도 나왔지만, 저자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자존감을 제일 깎아내리는 존재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이라는 얘기가 있다. 연쇄살인범이나 흉악한 범죄자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문장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건 인간은 아무리 성장해도 어린 시절에 겪은 악몽 같은 기억은 떨치지 못한다는 말이고, 그때 받은 상처는 쉽게 극복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겉으로는 떨쳐버린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처를 치료하는 건,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다. 멋모르고 재미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지만, 던진 아이들은 그런 건 기억하지 못한다. 가족 사이도 그렇다. 나중에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한 사람에게 말해봤자,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거나 ‘뭐 그런 걸 꽁하게 품고 있냐’는 말 또는 ‘그런 기억 없다’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저자는 상담을 받고, 그 상처를 가족들에게 밝혔다.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선택이었고,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점이나 상처의 원인을 확실히 파악하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가 의사를 찾아간 것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책은 2권으로 이어진다. 한 권으로는 저자가 그동안 상처와 낮아진 자존감이 극복하는 과정을 담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상담을 받으면서 저자는 새로운 사람과 알아가고, 또 상처받지만 의연하게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초반과 달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마 많은 생각을 거듭하면서 화도 내고 후회도 하고 또 ‘이러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도 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리는 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고민 없는 사람 없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치열하게 살다 보면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나에게 위로가 되는 뭔가를 생각해보자. 저자는 떡볶이였지만, 나처럼 닭 다리 하나에 슬그머니 미소지으면서 힘들었던 날을 뒤로 보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