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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제 - 29 SECONDS, 2018
작가 - T. M. 로건
시간강사인 ‘세라’는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에 부닥쳐있다. 남편은 자아를 찾겠다며 다른 여자와 살고 있고, ‘해리’와 ‘그레이스’ 두 아이를 기르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전임강사 심사는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녀를 미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상사인 ‘앨런 러브록’ 교수의 갑질이었다. 평가를 좋게 해주겠다는 핑계로, 그는 계속해서 추근대고 성희롱을 일삼았다. 급기야 그는 세라를 호텔로 끌고 가려고까지 하고, 그녀가 다 해놓은 프로젝트 성과를 가로채기까지 한다. 하지만 세라는 그를 섣불리 고소할 수 없었다. 러브록은 학계는 물론이고 방송국에까지 영향력과 인맥이 뻗어있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교수이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그녀만 매장당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는 납치를 당할뻔한 한 소녀를 구해준다. 소녀의 아버지인 ‘볼코프’는 감사의 표시로, 그녀가 원하는 사람을 하나 제거해주겠노라 제안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을 덮었다 펴길 반복했다. 개 같은, 아니 개만도 못한 러브록의 추근거림을 차마 계속 볼 수 없었고, 갈수록 악화하는 세라의 상황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배나 제자에게 성희롱에 갑질을 일삼는 놈의 이름이 ‘러브’록이라니! 내가 아는 사랑이랑 개념이 다르거나, 이 세상의 사랑이 다 죽어버렸나 보다.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저 교수라는 XX는.
볼코프의 제안에 세라가 갈등하는 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같으면 신이 나서 러브록 이름을 곧장 댔을 텐데, 그녀는 며칠을 고민한다. 아, 내가 너무 비양심적이고 비인간적인 걸까? 아니면 뒷생각 안 하고 마구 저지르고 보는 타입이라서 그런 걸까? 하여간 세라가 갈등하는 가운데 러브록의 갑질 횡포의 성희롱은 도를 넘어서고, 그걸 읽는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몇 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Me Too movement’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운동이라고 해서 스포츠를 뜻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The #MeToo Campaign’으로 표기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여간 저 폭로 중에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나 성희롱에 관한 폭로도 꽤 많았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처벌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이 너무 흘러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고발한 피해자를 고소하기도 했다. 한국의 명예훼손에는 사실을 말해도 처벌을 받는, 이해할 수 없는 규정이 있다.
이 책에서도 러브록을 고소하려고 했던 피해자가 있었다. ‘질리언 아널드’라는 사람인데, 러브록에게 도리어 역습을 당했다. 그는 대학의 학장과 인사과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을 가졌기에, 그녀는 그들에 의해 성격이상자에 꽃뱀으로 몰려서 학계를 완전히 떠나야 했다. 그걸 알기에 세라는 러브록의 행동을 외부에 알릴 수가 없었다. 두 아이를 길러야 하고, 학계에서 쫓겨나기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이 아깝기 때문이다. 거기다 동료들은 뻔히 알면서도 그녀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 세라가 승진에서 떨어지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사표를 내면 되지 않아?’라고 물을 수도 있다. 책에서 세라는 계속해서 거절 의사를 밝히지만, 러브록은 그게 튕기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게 매력이라 더 좋아한다. 아, 진짜 왜 여자가 싫다고 말하는 게 좋아함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사람을 대하는 자세, 특히 이성을 대하는 태도를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사표에 관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으니 또 얘기하지는 않겠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긴장감 때문인지 아니면 러브록의 횡포에 부글부글 끓어서인지, 페이지를 마구 넘기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어떤 비참함이 세라를 기다릴지 보기는 싫은데, 또 어떻게 갚아줄지가 기대가 되는 그런 책이었다.
아, 진짜 러브록 같은 새끼는 이 세상에서 싹 사라져버렸으면 한다. ‘데스노트’나 요정 ‘지니’가 있는 램프가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