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스등 (Galight)
워너브라더스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제 - Gaslight, 1944
감독 - 조지 쿠커
출연 - 샤를 보와이에, 잉그리드 버그만, 조셉 코튼, 데임 메이 위티, 안젤라 랜즈베리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배우던 ‘폴라’는, 피아니스트인 ‘그레고리’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런던에 있는 폴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 집은 유명 오페라 가수였던 이모 앨리스가 물려준 것으로, 폴라는 이모가 살해당한 모습을 목격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레고리는 그녀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폴라가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실수를 하자, 그는 하녀들 앞에서 그녀를 망신주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결국, 폴라는 점점 소극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꺼리는 성격이 되어가는데…….
‘가스라이팅 gaslighting’이라는 말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인데,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동명의 연극에서 따왔다고 한다. 작품에서 폴라는 집을 밝히는 가스 등불이 희미해지는 순간, 누군가 집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남편인 그레고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도리어 그녀가 헛소리를 듣는다며, 과대망상 내지는 정서적 불안 등으로 몰아간다. 이에 폴라는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 생각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하녀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남편 그레고리 역을 맡은 배우가 앞에 있다면, 진짜로 쥐어패고 싶었다. 와, 어떻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는 거지? 하찮음과 경멸, 불신, 마치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차가운 눈빛이라니! 지금까지 내가 접한 영화 중에서, 그런 인상적이고 강렬한 눈빛을 보여주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내가 폴라여서 매일 그런 시선을 받고 살았다면, 으……. 폴라가 왜 그런 성격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어린 하녀가 버릇없으면서 도도하고 오만한 태도 역시, 폴라를 주눅 들게 하기 딱이었다. 그레고리가 하녀를 직접 고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인을 정신이상자로 모는 일에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 그런데 이 하녀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안젤라 랜즈베리’다. 70년 전의 귀여운 뽀시래기 시절의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눈매라든지 샐쭉한 표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아서, 알아볼 수 있었다.
폴라 역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냥 감탄만 나왔다. 사랑에 빠진 명랑한 소녀에서 남편의 정신적 학대로 점점 피폐해져 가는 모습으로의 변화가 놀라웠다. 초반과 중후반의 모습이 완전 달랐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연주회를 가기 위해 차려입은 모습은 우아했고, 그때의 표정은 설레면서 한편으로 불안감이 아주 조금 깃들었지만 동시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그 빌어먹을 그레고리 개XX가…….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조명과 구도를 통한 심리 묘사도 멋졌다. 이야기 역시, 보는 내내 그레고리를 패주고 싶을 정도로 몰입감이 철철 넘쳐흘렀다. 흑백 영화라고 지루하거나 스토리텔링이 별로일 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보다가 화병이 생길 수도 있다고 미리 알려 줘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