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제 - Agatha Christie's Marple, 2004
감독 - Andy Wilson/Charlie Palmer
출연 – Geraldine McEwan
‘아가사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탐정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두 사람 있다. 바로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다. 포와로는 벨기에 경찰 출신으로 전쟁 때문에 영국으로 건너와 런던의 아파트에서 살며 탐정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미스 마플은 ‘세인트 메리미드’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살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등장할 때부터 유명 작가인 조카가 있고, 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60대 후반은 확실히 넘었을 것이다.
영국은 뛰어난 추리 작가를 가진 덕분에, 그녀가 만든 두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들로 드라마를 여러 편 만들었다. 이 시리즈는 그중에서도,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어떤 영국 드라마는 한 시즌에 서너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고 편당 방영시간이 90분에 달하는 경우가 있다. 거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도 그런 유형이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The Body in the Library』는 ‘서재의 시체 The Body in the Library, 1942’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고싱턴 홀의 주인인 ‘돌리’와 미스 마플의 연합은 훌륭했고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동물을 보며 힐링하는 남편과 형사를 뒤로하고, 직접 수사를 하겠다고 나선 두 사람의 적극적인 모습이 멋졌다.
두 번째 이야기인 『The Murder at the Vicarage』는 ‘목사관 살인사건 The Murder at the Vicarage, 1930’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결말 부분에서 보여준 사형 장면은 오싹했다. 원작에서는 없던 장면이었는데, 무척이나 극적이고 그 사람의 표정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원작에서 슬쩍 지나갔던 미스 마플의 옛이야기가 참 애달프게 그려졌다.
세 번째 작품인 『4:50 from Paddington』는 ‘패딩턴발 4시 50분 4:50 from Paddington, 1957’을 영상화했다. 원작에서는 미스 마플을 도와줬던 ‘루시’가 누구를 선택하는지 밝히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결말을 보여줬다. 내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 노인네의 돈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 자기를 구원해주고 돌봐주길 바라는데, 그 사람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편인 『A Murder Is Announced』는 ‘예고 살인 A Murder is Announced, 1950년’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드라마 ‘닥터 후’에서 내 최애 캐릭터였던 ‘닥터 도나’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딱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내 최애 캐릭터라니, 이런 멋진 일이!
소설 원작이라고 하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범인의 성별이라든지 등장인물의 관계 같은 것을 바꾼 경우가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현대적인 감각도 넣고 싶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티가 집필했을 당시에는 별로 다루지 않았던 동성애에 관한 얘기도 넣고, 거의 모든 소설의 중심 동기인 ‘돈’과 ‘사랑’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서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사랑에 관해 얘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평생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집착이라든지 소유욕 같은 것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거의 15년 전에 만들어진 드라마라, 몇몇 배우들은 지금보다 훨씬 앳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어, 저 배우 익숙한데? 저 얼굴에 주름을 좀 넣고…….’ 그런 생각에 검색하면 역시 그 사람이 맞았다.
그나저나 전쟁 중에 식량 배급을 받을 정도로 다들 절약하는 가운데, 자신이 재배한 가장 큰 호박을 상자에 넣어 마음에 둔 사람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하아, 진짜 달달했다.
어릴 적에 미스 마플 이야기를 읽고는, 나중에 나이 들면 꼭 미스 마플 같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매번 깨닫는다. 우선 난 뜨개질을 싫어하잖아? 안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