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제 - A Quiet Place , 2018
감독 - 존 크래신스키
출연 - 에밀리 블런트, 존 크래신스키, 노아 주프, 밀리센트 시먼즈
거의 폐허가 된 마트에서 한 가족이 물건을 챙기고 있다. 아빠, 엄마, 십대 초반의 두 아이와 대여섯 살로 보이는 막내로 이루어진 그들은 맨발로 하얀 흙이 뿌린 길만 걷는다. 그런데 맨 뒤에 있던 막내가 커다란 소리가 나는 우주선 장난감을 작동시킨다. 아빠는 아들을 막아보려 달려가지만, 괴생명체가 나타나 아이를 공격한다. 찢긴 신문에 적힌 헤드라인에는 그것은 소리에 반응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남은 네 사람은 여전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전과 똑같지만, 내적으로는 많이 달라져있다. 큰딸은 동생을 챙기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아빠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아이를 임신했고,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빠는 청각장애를 가진 큰딸을 위해 보청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큰아들은 장남으로 가져야 할 책임감에 버거워하며 집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한다. 어느 날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엄마의 양수가 예정보다 빨리 터지는데…….
포스터와 카피만 보고 몇 년 전에 개봉한 ‘맨 인 더 다크 Don't Breathe, 2016’ 류의 영화가 아닐까 추측한 작품이었다. 예고편을 보니 인류가 멸망에 처한 이후를 그린 것 같았다. 어쩐지 기대가 되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는 만족감을 갖고 극장을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교훈은 역시 이과를 전공해야 세상이 망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극중에서 아빠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연구까지 해가면서 딸의 보청기를 만들고, 괴생명체의 약점을 찾아낸다. 게다가 집 주변에 CCTV까지 다 설치하여 여러 개의 모니터로 감시도 하고, 틈나는 대로 소리 나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자주 다니는 길에 고운 흙까지 뿌려놓는다. 그뿐일까? 아이가 태어나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지하에 방음장치까지 만들고 있었다. 저 아빠, 분명히 이과 그것도 기계 분야를 전공한 게 틀림없다. 부부의 출산 준비는 너무도 꼼꼼해서, 보는 내내 놀랍기만 했다. 처음에 엄마가 산소 호흡기를 준비하기에 왜 그럴까 했는데, 나중에 보고 ‘우와’하고 감탄했다. 굳이 그 상황에서 아기를 갖고 싶었을까 생각했지만, 막내를 그렇게 잃고 나서 내린 선택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나나 애인님이나 둘 다 문과인데 큰일이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주인공 가족들처럼, 보는 내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른 공포 영화였다면 깜짝 놀라면서 ‘헐!’ 내지는 ‘으악!’하는 소리가 나왔겠지만, 이 작품은 그런 소리가 나오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전에 ‘맨 인 더 다크’를 볼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슷했다. 내가 작은 소리라도 내면, 그걸 듣고 괴생명체가 주인공을 공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해서 가족들을 하나둘씩 위기로 몰아넣었다. 마치 관객에게 ‘이래도 소리 안 낼래?’라고 시험하는 분위기 같았다.
특히 집에 혼자 남은 엄마에게 닥친 시련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소리가 나는 건 당연하다. 갓 태어난 아이의 특징이라면 우렁찬 울음소리이고, 엄마 역시 출산 시 엄청난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 위기 상황을 어떻게 넘길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두근거리고, 설마 하는 불길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영화는 각기 밖에 있던 가족들이 집으로 달려오는 장면과 아이를 낳는 엄마를 교차편집해서 보여준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괴생명체가 돌아다니면서 때려 부수는 소리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가족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90분 정도 되는 상영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 내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물론 가족들이 말 대신 수화로 하기에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초반 상황을 보여줄 때 빼고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빠른 속도의 교차편집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자아내는 장면도 있었지만, 신파라고 ‘에휴’하기보다는 비장미가 느껴졌다.
영화는 ‘마이클 베이’가 제작에 참여한 것치고, 건물이 폭발하고 자동차나 폭탄이 펑펑 터지는 장면은 없었다. 그 말은 즉, 괴생명체와 벌이는 대규모 전투 장면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걸 예상했던 사람들에게는 결말이 조금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믿고 성장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폭발 장면이나 전투 장면이 없어도 감동적이고 훌륭했다.
대사 하나 없이 고통을 표현하는 걸 보고, ‘에밀리 블런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전에 보았던 영화 ‘걸 온 더 트레인 The Girl on the Train , 2016’에서 알코올 중독자 역할을 진짜 술 취한 사람처럼 잘 한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는데, 여기서 보여준 표정 연기는 그보다 훨씬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