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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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인의 <기담>을 읽은지 오래되었다. 오래되었지만 짚어보면 <시차의 눈을 달랜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순으로 두서없이 읽었으니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책에서 어떤 감흥을 받았을 때 평론을 적는 것과 산문을 적는 것은 그 방법이 다르다. 하나는 느낌을 명제화해서 어떤 의제로 만들어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느낌을 나누는 것이다.’라고 <느낌의 공동체>를 출간한 신형철 평론가는 말했다.1)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느끼다’라는 동사에는 ‘서럽거나 감격스러워 울다’라는 뜻이 있다. 어쩌면 사유와 의지는 그런 느낌의 합리화이거나 체계화일지도 모른다2)고 신형철 평론가는 <느낌의 공동체> 발문에 밝히고 있다.

느낌을 나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개인이 대상에 인지해서 가지게 되는 느낌은 개인에게는 명징한 이미지이겠지만 언어의 외피를 입는 순간 추상성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느낌을 나누는 것은 나누는 그 순간부터 어려워진다. 어려워지지만 근본적인 것은 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어휘로 느낀다는 것을 개개인이 느끼게 된다. 느낌은 그렇게 나누어지고 공유된다.

김경주 시인의 시에 대해서 느낌을 나누어 볼까 싶어 시작한 말머리에 신형철 씨의 이야기만 봄날 곡식 낱알 뿌리듯이 부려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부려놓은 말들의 씨앗에서 어떤 것들이 피어나게 될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저 느낌을 나눈다고 신형철 씨의 말을 빌려온 것이 아니다. 신형철 씨가 자신의 두 권의 책 <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의 지면을 할애한 사람3)이 김경주 시인이다. 두 지면을 통해 신형철 씨가 나누고자 한 느낌은 <나는 외로운 사람이다>에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그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지금 내가 느낌을 나누려고 하는 것은 김경주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기담>이기 때문이다.

시와 시인 그리고 시집이라는 언어들이 암묵적으로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서정성’을 기대하고 김경주의 시집과 시들 - 구태여 시집과 시를 분간해서 쓴 이유를 사족처럼 붙인다면 시집은 시를 담아내는 커다란 궤일 뿐 시집이 시를 설명할 수 없고 시가 시집에 귀속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는 한 편의 시로 유약한 듯 보이나 하나의 세계를 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을 만난다면 시쳇말로 식겁을 하게 된다

시집을 펼치면 시인이 시들을 읽어주기 전에 말하는 , 일방적인 선언과도 같은 언사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집의 처음이 아니라면 마지막에라도 꼭 등장한다. 시집의 해설은 읽지 않아도 시인의 말을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 시집을 읽어온 자의 감이라면 감이다.



내가 시를 쓰는 일은 피부에 살았던 기억이 전혀 없는 설계도를 새겨 넣고 , 그 설계 안으로 들어가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난한 파충류는 곧 몸에서 열을 뱉어내고 그것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를 쓰건 쓰지 않건 시를 생각하는 행위에는 , 언어를 열고 보면 그 속에 존재하는 멀미와 미로 때문이라도 언어 속의 가로등과 진피가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험이하고 보기에는 혁명에 가깝고 , 혁명에 가깝다고 보기엔 너무나 원초적인 주저함에 가까워서 우리는 조금씩 열렬한 불순물에 가까워질 뿐이다. 너무 선명한 고해가 피로해서 나는 도처에 어지럽혀져 있다. 여기선 그 혈액을 흔들어 보기로 한다.




바람은 한 번도 목장을 갖지 못했고 목장은 한 번도 바람을 가두지 못했다.

이 시집을 세계에 활공하는 두두에게 바친다.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피부에 설계도를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언어와 낱말로 설계를 구축하고 조망하는 일이다. 없음에 기원을 둔 있음이다. 태조에 인간이 있었듯이 태초에 시가 있었을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태초의 언어를 찾아 떠나는 퇴행이다.

언어로 구축된 표피들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실험이라기보다는 혁명에 혁명이라기보다는 원초적인 주저함에 가깝다’. <기담>에 얽힌 시들은 시형식의 실험이다. 실험을 빙자한 혁명의 전사(全射)4)로 읽어도 무방하다. 원초적 주저함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인의 생각이고 시에 비춰진 것에는 주저함이란 없다. 앞으로 나아간다. 실험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다. 완벽한 성공 완전한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차이를 견뎌 시간의 중첩된 어느 시점에서는 실험이 아니라 전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견뎌낸다면 말이다. 이미 시를 쓴 선배 ‘이상’이 이룩한 그 경지 말이다.

‘바람은 한 번도 목장을 갖지 못했고 , 목장은 한 번도 바람을 가두지 못했다’라는 문장은 언어들은 한 번도 시가 되지 못했고 시들은 언어를 가두지 못했다라고 읽힌다. 김경주 시인의 실험은 자신이 의도한 것을 이뤄내지 못한 듯하다. 이뤄내지 못하고 사산된 기록들을 <기담>이라는 시집에 담은 모양이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 편의 추한 이이기도 아닌 기이한 이야기(奇談)다.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한 그릇을 깨어야 할 것인가 그릇 안에 차거나 넘치게 담아낸 사람을 호통쳐야 하는 것인가는 애석하게도 객체일 수밖에 없는 읽는 사람들의 몫인 듯하다.

김경주 시인의 실험의 주무대는 장과 막 무대가 존재하는 연극이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보통 부로 나누어지던 것이 막으로 나누어진다. 기담이라는 연극은 3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가 가지는 서정성 서정성을 넘어서는 서사성 서사성을 극단까지 몰고간 형태라고 보여지는 연극 지문과 대사들이 <기담>이라는 연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연극 대본을 보면 처음에 지문과 해설이 나온다. 무대의 상황 설명을 위해서다. <기담>이라는 시판일 시작되기 전에 때와 장소 등장인물들을 해설하면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이’에 대해서 설명한다. 나는 ‘사이’를 ‘차이’로 오독하고 마는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말미(末尾)의 시 ‘비정성시’탓이다. ‘비정성시’는 김경주 시세계의 생명수(生命樹)라고 생각하는데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처음 읽었을 때 이해되지 않던 관념 속에서 유영하던 시들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말미를 읽었을 때 연계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 목련의 처연한 죽음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똑같은 톤으로 노래하고, 시나리오와 희곡과 장시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다. 서정에 능한 가객인가 싶다가도 다시 보면 이렇게 치열한 사색가가 또 없다5)’고 <느낌의 공동체>를 통해 신형철은 김경주를 평가한다. 시나리오와 희곡과 장시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 것은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시작되었고 <기담>에서 진행중이고 <시차의 눈을 달랜다>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형식의 파괴라고 불릴 수 있는 작법은 그의 시가 충분히 낮익지않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를 통해 실험하고 실험이라기 보다는 혁명에 가까운 몸짓을 한다. 곡진하게 밀고 나간다.

시인의 시는 결과물이다. 결과물은 연필 끝을 통해서 고착되는 순간 시인의 것이 아니다. 읽는 독자의 것이다. 이제까지 일반 독자가 아닌 사람들이 김경주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었는가에 대해서 어눌하게 풀어놓았으나 이것은 내 것 즉 독자의 것이 아니다.

<기담>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제시 ‘기담’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식물은 자기 안의 짐승으로 토하다 가는 거고 / 인간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이 아니야/ 자기 안의 식물을 모두 토하고 가는 거지’(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였다. 식물과 동물 ( = 인간) , 서로의 대척점에서 죽음 즉 끝을 맞이할 때 쏟아내는 것 속의 것, 내면은 상반되는 것이다. 식물은 동물성을 동물은 식물성을 쏟아낸다는 것 절묘한 표현이며 서정성의 극한이라고 생각했다.

김경주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사이와 차이’ 외에도 한 가지 얻은 이미지가 있다면 음악이 김경주 시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번 시집 < 기담>에서도 소리 혹은 음악에 관한 언술이 보인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주저흔)고 말하거나 이 세상에 사람으로 진하게 흘러나와서 사람으로 연하게 버티는 일은 우는 일박에 없는 것인데 전생에 한 번은 이곳에 와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자신의 전생을 울고 갔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울음을 운다는 것 , 세대가 전승 된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소리로 가능하다. 소리는 울음이다.

<기담>에서 김경주 시인은 언어와 문체에 문장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들을 가끔 보게 된다. ‘잠 속에 한 육체를 업고 지나가다가 백 년은 봄에 이륙할 것 같은 문체를 본적이 있다. 문체라니 . 문육(文肉)이다.’ ( 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 꽃밭에 묻은 양배추인형) ‘다른 피를 밴 구름 / 연필이 마신 등고선들 /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르는 문장 / 음울한 한 짐승의 물방울’(풍선의 장례) , 시간보다 우위에 있는 ‘공간’으로서 , 촛불은 여기서 한 번도 썩은 적이 없고 저기서 ‘언어처럼 우리가 흙으로 묻을 수 없는 색으로 부유한다’‘허락된 이 지면으로 지금 이 천공(天工)을 언어에 허락할 수 있을까? 언어여 나는 언제나 네게 차가운 질(膣)이었다. (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시간 - 벽의 숙주는 틈이다 안으로 어떻게 들어갔을까?) 연필 끝을 통해서 드러나는 언어들 그 언어들을 지면(紙面)에 안착시키는 것은 흙으로 묻어 은폐하려해도 할 수 없는 언어다. 이러한 언어들은 김경주 시인을 통해서 생산되는데 대부분의 언어들은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러야 하는 운명이다. 사산되는 언어들에 대해서 김경주 시인은 ’잠 속에서조차도 문체를 잊지 못하고 절규한다. ‘문체’가 아니라 ‘문육’이라고 선언하다.

김경주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연필에 대해서 생각한다. 의미가 언어가 되어 나오는 도구다. ‘연필은 잡념의 생식기’(연필의 간) , ‘알겠다 연필 속에서 물새들이 활공하는 소리 들린다’/ ‘그것은 눈부신 문자의 활공 같은 것’(물새들의 초경) ‘나방 속에 떠다니는 얼음들이 연필심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사랑해야 하는 딸들) ‘위액을 토하는 연필’(내시경) 과 같은 문구들이 산재한다. 김경주 시인은 관념론자6)에 가깝다고 한다. 의미들이 부유하고 그것은 부유할 뿐 쉬이 고착되어 언어가 되지 못한다. 언어가 되려다가도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일쑤다. 잡을 수 없는 것을 겨우 잡아내어 무너지지 않게 써내려 가는 작업을 시라고 할 수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

김경주 시인은 ‘비정성시’를 생명수로 삼아 뻗어나간다. 시라는 기본 서정을 놓고 시의 형식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시이기도 하고 희곡이기도 하고 시나리오이기도 한 그의 시들이다. 그의 시는 한 편의 사람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고 한 편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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