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경주 이민하 황병승의 시집 순으로 읽는 요즘이다. 김경주의 저 멀리 있는 세계와의 시차는 단정하지만 단정해서 빈틈이 없었고 이민하의 환상성은 서정성에 길들여지고 세뇌되어진 시단의 족속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형이다.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딛는 순간 발바닥에는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남는다. 마지막 황병승의 시들을 읽는다. 전통적인 시의 서사와 서정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 지워진 명왕성처럼 아득하다. 시의 새로운 지평이기도 하고 거대한 실험이기도 한 황병승의 시에 대해서 말하고자 어듬더듬 글머리를 연다. 글머리를 여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을 왜 주저하면서 최초의 한 음절을 뱉어내려고 고통스러워하는지 내 스스로도 의문이다. 내가 풀어야 할 의문의 내 문제이니 접어두고 황병승 시인의 시집이나 읽는다.



황병승을 읽으면서 샤먼의 제의를 생각한다. 구술되어 전해지는 무가를 생각한다. 긴 서사는 웅얼거림에 가깝다. 웅얼거림은 분출이다. 잇닿는 것이다. 하늘과 인간을 잇닿는 것이다. <트랙과 들판의 별>을 읽다가 보면 뒤죽박죽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뒤죽박죽은 샤먼의 접신을 닮아 있다. 조금 과장을 해보자면 황병승의 시들 초입에 ‘눈보라 속을 날아서’가 등장하는데 ‘snow storm'은 코카인 파티 , 마약에 취해 황홀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속어라는 설명이 나온다. 접신은 하늘과 신에 닿은 취해 황홀해진 상태에 다르지 않다. 황병승은 샤먼이다.




샤먼 혹은 당골 혹은 만신들에도 전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황병승 시인이 이번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주로 이야기 한 것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읽기로는 인간의 삶이고 글쓰기다.




먼저 인간의 삶에 대한 문장들을 읽어보면 ‘죽음 , 그런 것은 지우고 다시 써버린다 / 탄생 그런 것은 시시해서 지우고 다시 써버린다.’(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 - 이하 생략 - , ‘엽차의 시간’ 중에서)죽음도 탄생도 경외시 되고 축복되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지우고 다시 써버려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것 , 때때로 누군가 완전히 죽여주는 것’(썸 비치들의 노래’ 중에서) 이라고 말한다. 탄생과 죽음은 이미 축복과 경외와 두려움을 박탈당했고 탄생과 죽음의 극점들을 연결하는 ‘삶’마저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 주는 것 , 죽여주는 것은 타인에게는 행복을 주는 행위지만 자신에게는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데 , 일종의 보살행이라고 읽힌다.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다’(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중에서) 고 선언한다. 태어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이지만 태어남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일 수 있지만 삶을 살아야 하는 자에는 어디까지나 나쁜 일이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고 살아낸 이상 죽음을 맞는 것이 순리다. 피할 수 없는 순리다. 황병승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소원이 하나 있다며 그것은 한 번만이라도 생긴대로 살고 싶은 것 하지만 그게 안돼서 말처럼 쉽지 않아’(눈보라 속을 날아서 (하) 중에서) 라고 말한다. 천만번 백만번 맞는 말이다. 사람들의 삶이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황병승 시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중에서)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방적인 이해는 이해가 아니라 어쩌면 물리력 없는 정신에 가하는 치명적인 폭력이다. 당신과 내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황병승 시인에게 한 말씀 보태자면 ‘태어나지마라 죽는 것이 고생이다. 죽지마라 태어나는 것이 고생이다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고생이다’라는 원효 선사의 게송 한 자락 읊어주고 싶어진다.




글쓰기에 대한 것을 살펴보자면 ‘더는 글 따위는 쓰지 말자 나는 어쩌다 어둠 속을 떠도는 시인 나부랭이가 되었나’(헬싱키 중에서)고 자탄한다.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청체불명의 글쓰기, 창피하게도’(‘잔디는 더 파래지려고 한다’중에서) 시인들이 시인이 되고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언어를 제련하는 사람이 되고 언어의 뼈를 찾는 사람이 되어서 죽을 때까지 하는 고민이고 그 고민은 어둠 속을 떠도는 것과 같다. 그 답은 요원한 곳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발을 들여놓았으니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 전지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어둠 속일지라도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씀으로 존재한다. 그들에게 지나온 기은 언어들이 쓰러지고 빗어낸 길이다. 글을 쓰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스스로 짊어진 천형이다.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 내려간 사람이 황병승 시인이다. 코카인 파티에 취해 환상 속으로 접어들어 접신의 상태에서 써내려간 언어들은 세련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 글이 죽었는지 살아있는 글인지 알 수 없다. 세련됨 속에 숨겨진 의미들은 장막 너머로 숨어버려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황병승 시인은 <여장남자 시코쿠>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을 써냈다. 글쓰기를 통한 존재의 확인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관조라고 해도 좋겠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글들을 쏟아낸다. 쏟아낸 글들은 시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죽었던 글들을 사람들이 살려내고 살았던 글들이 사람들에 의해 죽기도 할 것이지만 시간의 중첩이 있은 후에야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집에서는 어떤 말들을 웅얼거릴지가 궁금해진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창피함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