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완유세설령 - 내 블로그 이름이자 내 방이름이다 - 에 들어 앉은지 일 주일이 지나고 있다. 산책을 하고 뒹글거리다 심심해져서야 책 한 장 읽는다. 책을 읽기에는 날씨가 좋았고 꽃들은 더 화사했다. 흰색과 붉은색 보라색 노란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탓에 꽃 따라 다니르라 글 한 자 볼 여가가 없었다. 꽃이든 계절이든 한 철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절정의 순간에 절명하는 묘리를 수천년 혹은 수만년의 생을 통해 체득한 모양이었다. 꽃이 시드니 다시 칩거한다. 꽃 무더기의 죽음을 맞았을 때 나는 생명 없는 것이 생명을 가지게 되는 비의(秘意)를 파헤치는 책을 읽고 있었다. '<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노마 히데키라는 분이 쓰신 일본인을 위한 한글 교양서라고 들었다. 일본인을 위해 일본어로 쓰였다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점이 재미있다. <한글의 탄생>은 아시아 태평양상 대상을 수상한 책이다. 발행부수가 약 400만부 정도 된다고 역자 후기에 써 놓았다.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인문 교양서의 1쇄 발행부수는 초라하기 기지없는 숫자다. 그나저나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니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탄생을 말하기 전에 맹아가 싹트던 시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어사에서 음독과 훈독 순독과 역독 구결과 이두까지 찬찬히 설명해 둔 부분이 가장 먼저 자리 잡는다. 언젠가 성경 책을 읽다가 도저히 읽히지 않아 덮은 기억이 있는데 예수의 족보를 읊는 대목이었다. 근원을 찾아서 다시 내려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술술 읽히지도 않는다. 문자의 기원을 찾고 만들어지기까지 중첩된 시간과 인식을 기술하는 것도 이와 달라보이지 않는다.

 

  읽으면서 일반 교양서적의 테두리는 벗어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다.일반 언어학을 익힌 적이 있는 일반 교양인에게는 쉬울 수도 있겠다.  쉽게 풀어 쓴다고 썼으나 접해보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경한 것들이 지뢰처럼 깔려 있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지뢰를 헤치고 나아가야 앎에 대한 쾌감이 증폭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계속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리가 있었고 훈민정음이라는 문자체계가 완성되기 전까지 한자의 영향권 아래에서 지내다가 소리가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 훈민정음의 창제다. 한반도 우리의 소리가 우리의 형을 가지게 된다. 무형이 유형화 되고 유형화된 것은 고착되게 마련이다. 무형에서 유형이 되는 것 또한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유형의 것이 고착되어 널리 쓰이는 것 또한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긴 시간을 견뎌낸 문자체계 훈민정음은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오늘에 전해지고 한반도에서 쓰인다. 소리가 형태를 얻어 영원히 살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체득해서 쓰고 있는 모어화자들은 자신들의 문자언어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지 못한다. 원래 가진 것을 눈여겨 볼 사람은 없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할 따름이다. 영어를 일본어를 중국어를 동경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어는 따로 배우려 들지 않는다. 노마 히데키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이지만 한글에 대해 공부했다. 책을 썼다. 읽히는 책을 썼다. 한반도에 날고 긴다는 한글학자들이 있다. 노마 히데키가 어깨를 비견할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노마 히데키만큼 글로써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 딱딱하지 않고 유려하고 부드럽다. 이 책이 다른 언어학 교양서와 다르게 읽히는 이유다. 가장 사소한 차이이면서 가장 큰 차이다. 좀 더 과하게 말해보자면 얼치기 국어학 박사의 논문보다 더 재미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한글을 노마 히데키처럼 설명하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는 것일까?

 

  오랫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 예전에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엉망이었다. 기생을 한 쪽으로만 평가했고 창기만을 주로 썼다. 인문 교양서가 아니라 인문 가십서였다. 이 또한 한국인이 쓰지 않고 일본인이 썼다.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조금은 걱정했다. 왜곡된 시선은 없는가 조심스레 읽었다. 다행히 왜곡되고 편향되지 않은 읽을만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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