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 카이에 소바주 2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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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신화에 이은 범고래 신화의 출현은 인간의 두뇌발달과 역사 시대로의 진입과 괘를 같이한다.

곰의 신화가 인간에게 충만했을 때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였고 대칭적 사고의 시대이며 이것은 범고래로 대표되는 파괴의 신화가 아니라 상호 존중(자연과 인간)의 시대였다


범고래 신화의 시대는 폭력과 파괴의 신화이며 상호존중의 사고가 균열되고 파괴되기에 이른다.

문화(공동체 사회의 규칙)속에서 수장과 샤먼 전사 비밀결사의 리더들이 공존하던 시대-수장은 이성의 영역을 그 외의 리더는 이성을 넘어선 부분을 관장한다- 에 비밀 결사의 식인(사람을 먹는 것. 일종의 비유이며 상징 .여름철 동물을 인간이 사냥했으니 겨울에는 그 관계가 역전되어야 한다는 대칭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물리적 식인과는 차이가 있다.)이 수장의 지위와 권의를 먹어치움으로써 대칭성 사고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문화의 시대가 아닌 문명의 시대 폭력성을 태생적으로 내재한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를 야만의 시대의 도래로 본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불균형과 파괴의 시대가 시작되며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왕이 출현한다. 국가가 출현하고 문명이 시작된다. 야만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9.11테러가 일어날 즈음 쓰였으며 미국이 이슬람의 행위를 야만의 행위로 규정할 때 이분법적 사고의 해결 대안 제시의 성격으로 이루어진 강의다.

서로 대칭(대칭이라는 낱말이 주는 상호 극단의 이미지는 제거할 필요가 있다. 상호대척의 한 극점이라는 긴장의 관계가 아니라 어깨동무 할 수 있는 수평적 사고라고 생각하면 좀 더 이해가 쉽다)적 사고의 관계 속에서 사고한다면 서로를 야만적이라고 말 할 정당함과 논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정당성 논리보다 먼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만의 시대에서 자연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는 불교의 사고를 끌어들임으로세 해결하고자 하는데 물론 변형된 현대의 불교라기보다는 싯타르타의 시대 그 때의 순수한 불교정신을 사고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17 08 01에 기록되었어야 할 내용 휴가 2일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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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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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 신이치 . #동아시아

연석과 신데렐라 원형 분석이 산뜻했다

신데렐라의 잃어버린 신발과 오이디푸스 연결 또한 산뜻했고 신데렐라와 오이디푸스의 샤먼 변형은 충격적이었다.

심봉사와 청이 그리고 바리데기가 생각나는 글들이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신화분석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성찰 비판하는 마무리가 더 좋았다. 역시 모든 것은 고유불급이니 중도와 중용을 지켜야 하는 모양이다. 옮긴이도 말했지만 이 강의를 직접 들었다면 신화학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동의한다

휴가 첫 날 with Four Seasons Concerto No.1 in major Op & Yame Koucha 紅茶

#카이에소바쥬 #책스타그램 #휴가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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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 철학자 장켈레비치와의 대화 철학자의 돌 4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변진경 옮김, 이경신 해제 / 돌베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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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조증과 울증의 연도가 있다면 나의 2017년은 울증의 시기다. 모든 무기력들이 내파와 외파를 통해 오롯이 드러나게 된다. 그저 견딜 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체득하였으므로 시간을 보내어야 한다. 그러나 쉽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물리적 시간과 개인적 시간은 교차하면서 더디게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다향스러운 것은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고 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나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로 지금껏 견디고 있는 중이다.

스무살 봄 , 그즈음 장기를 하나 떼어내면서 죽음은 내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두렵지만 또한 그렇게 두렵지도 않은 그런 묘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관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부터..... 울증과 조증의 한 해들이 반복되었고 조증이었을 때나 울증이었을 때나 죽음을 곁에 두었으나 깊이 사유하지 않았다.

최근에 발견한 책이 돌베개에서 나온 [죽음에 대하여]라는 책이다. 장 켈라비치라는 철학자의 대담집이었다. 책장 사이로 드러나는 장 켈라비치의 독특한 머리스타일이 멋스러웠다. 사유하는 죽음 ,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아무래도 쟝( 장이 아니라 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옹처럼 죽음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지금 우리시대에서 죽음은 여전히 말하기를 주저하게 되는 금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쟝 옹의 사유는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언듯 언듯 드러난다. 나는 잘 알지 못하므로 그저 그네들의 대화의 청자로 쟝 옹과 대담자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책을 읽은 다음 내 생각을 어떠하다고 봄날의 바람처럼 흘려버렸을 것이지만 , 이런 류의 책은 딱히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를일이다. 많은 느낌들이 있지만 시간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그라들어 이내 기억 속에서 부서져 나갈 것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방법인 발췌하여 기록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한다.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향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움직임이라고 명명한 죽음과 관련된 우리의 두려움 근심 , 불안에 대한 답이다.

2인칭의 죽음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서 1인칭 죽음과 3인칭 죽음 양쪽에 접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철학적 경험입니다. 2인칭 죽음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비개인적이고 익명적인 죽음도 아니고 , 나의 죽음도 아니면서 나의 죽음과 가장 유사한 죽음입니다. 죽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므로, 나는 계속 살아가게 됩니다.나는 그가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고 그의 죽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이지만 바로 그 사실이 내가 그 죽음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게 합니다. 그 죽음 이상으로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철학은 우리 곁이 가싸운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스무살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모든 내용은 시간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지워졌지만 단 하나 ,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이라는 구절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랬다.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지만 그 개별의 죽음은 타인의 의식 속에 스며든다.

인간의 삶은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지만, 출생과 죽음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이 둘은 결코 동시적 경험 속에서 일어나지 않지요

출생 이전도 말할 수 없고 죽음 이후도 말할 수 없으니 인간의 삶은 현존하는 지금 현재에 대한 논의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육체를 통해 현존하고 , 표현하고 , 존재하고 , 살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육체로 인해 나는 다른 곳에 존재하지 못하고 각종 질병과 온갖 육체적 문제에 좌우됩니다. (한편 나는 언어를 통해 생각을 펴현하는 동시에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게 됩니다. 나의 생각은 항상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에 미치지 않거나 넘어서고, 또 거리를 둔 채 물러서 있기 마련입니다)

육체 혹은 육신의 속박에 대해서는 박상륭 선생의 소설 저작들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짓는 큰 테두리 중 하나가 육신이다. 저기 그리스도라 불리는 자를 생각해아도 좋다. 신의 아들이나 육신을 입어 현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몸과 말과 마음의 우주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죽음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지요 죽음은 우리의 우리의 생존을 방해하고 삶을 제한하다가 마침내 어느날에는 삶을 끊어버리지만 , 죽음이 없다면 인간이 될 수조차 없으며 잠재적 상태의 죽음이 위대한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열정과 열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삶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삶의 선험적 조건이니까요. 각각의 세대마다 당대의 관습 , 의학의 역량 , 평균수명에는 인간 실존의 고유한 리듬이 있는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이종의 형이상학적 노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영속성 앞에서 유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순간을 살아내는 것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죽음이라는 병은 병자와 가난한 자의 병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평입니다. 우선 이 병은 유한성입니다. 하지만 어떠함이라는 사실과 그 사실성 안에 있는 내용을 구별해야합니다. 인간은 내용 일시 수단 방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죽음의 날을 미루고 고통을 줄이려 합니다. 인간으로서 그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단 한가지가 그를 인간으로 규정짓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끝없이 미루고 지연시키면서 죽음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적인 기만입니다. 그것은 실존의 필연성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실존은 이와 같은 기만을 항상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죽음을 홀로 죽는 것입니다.

한국의 레퀴엠 즉 만가에서는 형제 자매가 많다해도 어느 누가 대신 하며 친한 벗들 많다해도 어느 누가 대신갈까?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랬다. 죽음은 예전부터 혼자의 것 개별이었다.

존재의 중단은 존재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존재는 자기 자신의 중단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죽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밀 자체가 없지요. 죽음은 비밀이 아니며 그 점에서 죽음은 신비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순진무구함의 신비처럼 백일하에 환하게 드러나 있는 신비입니다.

죽음에 대한 철한은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죽음을 무시하고 외면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저는 이 태도가 죽음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진지하게 고려하는 유일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세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는 신자들은 흔히 죽음과 내세의 삶을 동일시하고 내세는 현세가 보다 안락한 형태로 연장되는 것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내세에는 어떠한 제ㅇ한도 없고 모두 지복을 누리고 질병이 없으며 더는 살아 있는게 아니므로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이런 이야기들은 죽음을 경박하게 만듭니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의미의 부재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물론 일차적 관계에서 죽음은 삶에서 의미를 제거합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음이 곧 無이므로 - 무라는 개념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 나는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세의 부재는 나의 삶을 비어 있으므로 , 무에 이르게 하므로 나의 삶은 아무런 방향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다만 나의 아이들 나의 후손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지요.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한 나는 죽음의 안이 아니라그 밖에 존재합니다. 내가 죽게 되리라는 점에서 나는 죽음의 안에 있지만 내가 , 내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한에서는 그 안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치유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병 중의 병인 죽음이지요. 병은 필연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만 , 죽음은 건강한 사람의 병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 우리의 주제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즉 죽음은 삶의 일부를 이루며, 삶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의 존재입니다.

시간의 영속성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은 항상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죽음과 폭력은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항상 갑작스럽고 폭력적입니다.

죽음은 결코 자연적이지 않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경우 혈관 조직이 약해지고 , 면역력이 약해지므로 사망 가능성이 점차 더 높아지고 커질 뿐입니다. 별것 아닌 것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죽음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어떤 사건이 존재합니다. 노인의 죽음이라도 완전히 연소해버린 양초처럼 사그라지는 순전히 자연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인용은 검은색이고 개인의 생각은 보라색으로 문장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굴기를 달리해서 표시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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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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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플로베르란 이름은 들어본 듯 했다. 고전을 이렇게 또 읽게 되는구나.

읽으면서)
프랑스 소설은 왜 초반부가 더디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초반이 되게 힘들었는데 ......

엠마는 시대와 안 맞았네 근대가 아니라 현대에 태어났음 좀 덜 비극적이었..... 아니다 요즘은 더한 세상이니 예나 지금이나 불행했겠다

프랑스에 마담 보봐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자유 부인이 있는데 , 비교해서 보면 재미날 듯 하다

사실주의 계열이었군 또 사실주의에서 그 극단으로 밀고나간 자연주의 계열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감자라는 단편이 가장 대표적이지 복녀말이야

읽고나서)

음 오메가 제일 나쁜 사람 같아. 파국으로 몰고가는 원인을 제공한거 같거든 보봐리 부인의 개인적 파국이야 두 요인이지만 극 전체의 비극의 시작은 오메 씨라고 생각해 .

보봐리에게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보봐리를 사랑한 샤를르에게 사랑은 낭만 가득한 것이었으나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어 이래서야 사랑을 할 수가 있나. 로미오나 줄리엣도 사랑하였으나 죽어버렸지 역시 사랑은 할게 못 되는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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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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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읽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저 읽지 않은 책들의 무덤 속에 있었으면 그만이었던 책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유는 내 오른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책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부유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이유인 움직임을 극도로 귀찮아하는 내게 그저 가까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렇게 책을 또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이었다. 내 오른손에 잡힌 것, 그리고 직감했다. 읽으면 오래 걸릴 것이고 이해도 잘 못할 것 같다는 찰나의 직감이었다. 그리고 틀리지 않았다. 나는 라인홀드 니버의 사유 세계에서 길을 잃었다. 오르페우스의 실을 가지지 못한 머리카락 한 줌을 뿌려두고서야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처음 니버 씨의 세계로 접어들 때에 조심했어야 하는데 글로 쓴 사탕발림에 현혹되어 언젠가 읽은 적인 있던 소설이자 산문이었던 책에서 읽었던 '누가 괴물의 입에서 공주를 구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이미 개인과 대중 혹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은 도덕적 즉 순수할 순 있어도 사회 속의 개인은 순수할 수 없다는 - 조금 더 말해보자면 사회 속의 개인은 순순할 수 있지만 순순한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순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 점을 읽어서 알고 있었으니 왜?라는 답을 찾았으면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인의 비이기성은 국가의 이기성으로 전환된다는 니버 옹의 명제를 설명한 책이었다. 결국 니버 옹도 저 대중이라는 괴물의 아가리에서 개인이라는 공주를 구해내지 못했다.

니버 옹의 이야기는 지루하다. 초반부는 개인과 사회에 있어서 도덕에 대한 논의는 재미가 있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비도덕적 사회라든지 도덕적 개인에 대한 논의라기 보다는 사회의 다른 모습인 국가에 대한 비도덕성의 획득이라는 주제로 옮아가는 듯해서 개인의 양심과 이성과 이기심과 이타성에 대한 깊은 논의가 결여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역자 이한우 씨는 자기 나름의 제목을 '20세기에 도덕과 이성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하는가"라고 하고 싶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는 몇 단어 빠진 것 같아 보여서 조금 첨언해 본다면 "20세기 사회 혹은 국가 안에서 개인의 도덕과 이성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하는가?" 정도가 좋을 듯 하다.

개인이 그 집단의 지도자일 경우에는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야심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이기적 태도를 버린 지도자는 전체 집단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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