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AI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거 나중에 기계가 다 해주겠군" 하면서 말이다.

삼성폰이 통역서비스 어플을 자랑할 때도

앞으로는 영어 회화 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연히 지인이 보내 준

국회에서 제작한 달력 속 AI가 그렸다는 국회 주변 풍경을 본 순간

 

또 뇌리를 스친다.

뭐 사람이 그린 것과 무엇이 다르지?....

기계와 사람이 그린 게 구분이 되지 않은 세상인데

블록체인을 이용한 저작권 등록을 해야 하나...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이 아무리 잘 그렸다 해도

결국 기능적인 부분은 기계가 그린 것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기계가 그린 그림이 더 완벽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실수를 기계는 하지 않으니까.

 

유명한 화가라면 작품에 부여하는 의도나 예술성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아마추어가 그린 것은 그야말로 내세울 특이한 게 하나도 없겠다 싶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글을 쓰는 게 이젠 뉴스거리도 아닌 세상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를 기계는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뚝딱 만들어 버린다과정에 의미가 있다고 자위하기엔 참 허망한 일이다.

훗날 나같이 평범한 인간들은 AI의 그늘에 가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AI에게 없는 게 창의성이라고 하는데 평범한 사람들도 대부분 별로 없는게 창의성이다.  

나같이 어정쩡한 사람들로서는 앞으로 인간끼리 경쟁하다 느끼는 열등감과 소외를 AI에게도 느껴야 하는 슬픈 세상이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친 생각일까? 기계에 느끼는 이 감정은 뭐지?

 

이젠 오은영의 AI 상담소“ 김창옥의 AI와 잘 지내는 법 토크 콘서트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AI 스트레스 증후군 전문 상담사를 찾아가야 할 날이 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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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스케치는 주로 펜으로 그린다.

색을 입히는 것은 그리는 이의 자유다.

진하게 넣어 수채화 느낌이 나게 할 수도 있고

가볍게 넣어 스케치의 느낌을 더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펜으로만 그리는 게

어반스케치의 느낌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 같다.

펜이 가지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

단색의 펜 선이 주는 거칠지만 생생한 터치야말로

 

여행하면서 즉석에서 그려보는 현장감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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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인간은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오직 나의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다.

타인의 허락을 거부하려면 나의 명령이 그 만큼의 명분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명령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권위와 구속력을 갖고 있는가?


나의 명령은 오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나를 지배할 수 있는 권위는  이성이다.

여기서 이성이라 함은 합리적인 사고로서의 도구나 수단적 의미를 넘어서며

오직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과 그 외를 구분 짓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오직 목적 자체인 존재로 격상한다.

어떠한 수단이나 도구에 복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본질적인 존재.

이성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세계를 보는 눈이자

판단하는 기준인 것이다.


이런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자유로운 인간이란 누구도 아닌 오직 만이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이성이 내린 명령에만 복종하는 인간이다.

 

이성이 내린 명령이란 자율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법칙,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이다.

 

철학적 이성은 물리와 경험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개념의 세계다.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이성이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저 공허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런 이성을 논하는 것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관념을 기준으로

인간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성을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진화론에 입각한

생물학적 존재로서 그저 뇌과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극에 반응하고 환경에 대응하는 고등 생물로서

계속 진행되는 뇌의 구조와 역할의 연구 결과에 따라

그 정의를 계속 바꾸어야 하는 유동적이고 기계적인 존재가

인간의 정의라면 과학적이라고 박수를 쳐야 할까?

 

철학적인 정의가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스스로 오직 생각만으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불과 몇십 년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대다.

미래는 굳이 생각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인공지능과 완전한 자동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존재가 아닌 필요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소수의 생산적인 인간이 운영하는 기계에 의해 운영되는 세계에서

다수의 무용한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먼 과거의 철학을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 AI보다 고루한 관념의 철학자 칸트가,

유물론적 냉정한 뇌과학의 진실보다 관념론적 철학에 의지한 인간의 정의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래서 칸트는 미래에 역주행하는 인기를 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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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성(恒常性)이란 생명이 스스로 최적화 상태를 만들려 하고

이 균형을 유지하려는 특성이다.

항상성이란 평형상태며 면역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여

질병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잘 지키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미 잘 잡힌 균형을 일부러 깬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흐트러진 균형추를 다시 맞추기 위해 변화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상 없는 균형에 굳이 변화를 가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며

때론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항상성은 우리의 삶과 마음에도 존재한다.

오랜 시간 반복하여 굳어진 생활 패턴과

그에 익숙한 마음에 항상성은 존재한다.

 

항상성의 좋은 점은 안정이다.

안정된 삶, 안정된 마음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균형과 안정은 옳고 그름도 아니고, 좋고 나쁨도 아니다.

그저 자연의 법칙이며 평균의 황금률일 뿐이다.

 

그러나 안정이 지속되면 보수가 되기 쉽다.

현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에 변화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하고

설령 나빠지는 조짐이 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현상에서 멀리 가지 않으려 한다.

 

현재에 만족하라는 말은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라는 뜻이지

건강한 욕망까지 부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에 만족하면 수구가 되기 쉽다.

현재를 영원히 계속하려는 것이 보수고 수구다.

제자리에 머무르려다 보면 퇴보하기 쉽다.

 

언뜻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나아가고 있다면

결국 뒤로 조금씩 후퇴하고 있는 셈이다.

 

변화의 동기가 꼭 욕망은 아니다.

물질적인 욕망이 변화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이란 건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변화가 꼭 현실적인 결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낡고 고리타분한 옛것을 버리는 것도 변화고

한군데에 못박인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도 변화고

자신의 내부에 똬리를 틀고 화석화된 생각을 바꾸려는 것도 변화다.

늘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마음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려는 유목민의 마음이 변화의 마음이다.

 

변화가 어렵다 해서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조용히 끓는 기름에 차가운 물 한 컵 넣을 용기만 있으면 된다.

고요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질 힘만 있으면 된다.

 

변화는 현재의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른 자리인지

가만히 서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하고 반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기존의 나를 지키면서 한 걸음씩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균형 잡힌 인생에 뭔가 새로운 것을 넣어보라

그것이 새로운 경험이든, 지식이든 상관없다.

새로운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무엇이든 넣어보라

 

균형이 깨지며 폭발하든 끓어 넘치든 요동이 있을 것이고

다시 적응이 되면 고요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좀 더 변화된 균형일 것이다.

 

다시 현재의 균형을 깨트리는 뭔가를 계속 넣어

지속적인 화학반응을 유발하는 것이 도전이다.

반응-균형-반응의 순환이 발전의 과정이다.

 

반복되는 변화는 그 승패와 상관없이 자산으로 남는다.

변화의 불꽃에 미처 다 타지 못하고 남은 찌꺼기는

다른 변화의 불꽃에 다시 타오를 연료가 된다.

 

안정을 경계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어제의 나를 반성하고 오늘의 나를 따져보고

내일의 나를 모색해보는 꾸준하고도 집요한 과정을 반복한다면

크게 변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어는 순간 성큼 나아간

자신을 대면하는 반가운 날을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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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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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사회나 공동체의 올바른 도리나 이치다.

어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게 기준이다.

정의는 기준으로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게

결국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의미다.

 

흔히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한다.

그 말에는 자연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필연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숙명적인 권유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그냥 운이니 따지지 말고 받아들여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연이나, 세상은 공평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세상의 불공평을 일반화 합리화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대충 퉁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정의가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도덕적인 답을 내놓는다.

다수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공리주의나

자유주의에 입각한 선택의 자유 같은 이야기로 정의를 논하기 보다는

공평무사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법을 지키는 것이다.

올바른 것이다. 등 주로 도덕에 관련된 말로 정의를 대신한다.

 

그렇다. 우리에게 정의란 말 그대로 올바른 뜻이다. 도덕인 것이다.

문제는 도덕도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하고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는 것이다.

시대는 그렇다 치고 현대의 복잡한 문제와 사건을 놓고

막상 정의로운 답을 찾을라치면 여러 답안이 나온다.

 

현재 의사들의 파업이 정의로운가?

정부의 공리주의 입장에서 소수 의사의 이익보다

다수의 국민이 더 피해를 보고 있기에

이익의 총량에서 보면 정의롭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애초에 별다른 대화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완전한 정의는 아니다.

 

자유주의 선택의 입장이라면 

의사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파업을 했기에 정의롭다.

자유로운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여 증원을 강요한 것은

시장주의의 입장에서 부당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파업의 가장 큰 희생자인 국민의 입장인

도덕론으로 본다면 의사가 직업인에 앞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사명을 지고 있다고 보기에 어떠한 이유로도

환자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의료인의 자세를 이유로

정의롭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의사들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자동차공장에서 파업하는 건 정의롭고 

의사가 파업하는 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

내가 하는 일이 직업적으로 생명을 다루는 일이 되었을 뿐

자동차를 만드는 것 보더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부당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해 자신의 노력으로 의사가 되었다는

현대의 능력주의에 입각한 공정한 기회균등을 넘어서

태어난 집안과 타고난 머리, 그리고 의사가 대접 받는 시대까지도

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롤스의 완전한 평등주의에 따른다면

의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사회에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사태의 답은 파업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

정부의 인내를 바탕으로 한 어렵고도 기나긴 대화와 설득의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의사 집단의 똑같이 어렵고도 고민스러운 협상과 타협의 노력

하지만 현실은 늘 빗나간다.

정부나 의사나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목적은 같지만

각자의 정의만 부르짖을 뿐 국민을 위한 정의는 보이지 않는다.

 

열 명을 살릴 것인가 다섯 명을 희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공리주의식으로

해결하기는 쉽다. 다수를 택하면 된다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이 내 가족이라면

그 경우에도 공리주의에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정의를 말하기는 쉽지만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정의의 뜻을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의 구체적인 사례에 들어가면

다양한 가치관만큼이나 기준을 잡기도 어렵고 헷갈리기 쉽다.

어찌 보면 정의란 개인의 가치관만큼 다양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더욱 정의의 기준이 제멋대로이기 쉽다.

현대의 정의는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민주주의 하면 당연히 따라다니는 다수결의 원칙이란

결국 다수의 행복이라는 벤덤의 양적 공리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고속도로가 지나가서 사라지는 마을의 주민에게 정의를 묻는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자신들의 희생이 정의라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그 도로를 이용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강행하는

정부의 의지는 공리주의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렇듯 오늘날 국가의 정책은 상당수가 공리주의를 깔고 있다.

 

동성끼리의 결혼의 합법화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따지면 개인의 선택이니 정의이고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도덕주의의 입장이라면 보수는 아니라 할 것이고

진보의 입장이라면 정의라 할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문제들은 대부분 정의를 그저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기엔 너무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담고 있다.

정의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수학의 공식이라기보다는

같은 답이지만 푸는 방식이 여러 가지인 수학 문제에 가깝다.

 

어쩌면 현대의 정의란 결국 다수가 찬성하는

도덕이나 가치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도덕주의의 질적 공리주의 버전이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에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수결이 최선이자

최후의 답 또는 해결책이니 말이다.

 

우리네 삶이 늘 그러하듯이

답은 항상 정해졌지만 답을 내는 과정은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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