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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 운명을 읽다 - 기초편 ㅣ 명리 시리즈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12월
평점 :
운명(運命)이란 무엇일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꾸 드는 생각이다. 내 삶에 대한 의문이 들 때 마다 덩달아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운명에 대한 의문.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든 일들의 귀결을 볼 때마다 내 운명의 굴레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자괴감, 혹은 포기 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사주를 다시 들여다본다. 조금 공부하다 말다 다시 들춰보기를 어언 수년이다. 명리학도 궁합이 있는 것 같다. 보다가 허접한 내용을 접하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하며 내 던졌다가도 다시 접할 기회가 생기면 또 집어 들고 열공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러하다.
사주의 볼멘 소리
그냥 미신으로 치부하고 말면 될 것을 못 버리는 이유는 많다. 첫 번째는 자칭 ‘인문학도’의 자세다. 접하지도 않은 것을 단순한 귀동냥으로 매도하는 것은 당연히 인문학도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이 권위 있는 방법에 의해 정상적인 단계를 밟은 경우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나라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처럼 미련 없이 내다 버린 우리의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면 알 일이다. 버릴 건 버리고 남길 건 남겨야 하는데 아무런 고민 없이 매장해버린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민속 문화인데 “미신‘이란 이름으로 같이 매도된 것이 ’사주‘다.
물론 그동안 소위 사주로 밥을 먹고 산 사람들의 책임이 큰 건 사실이다. 혹세무민한 사주쟁이들 때문에 쌓인 사회적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사주는 단순히 ‘사주를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주보기 가 아닌 사주를 보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학문으로서 명리학을 말하는 것이다. 명리학의 역사는 길고 길다. 단순히 몇 권의 책을 본다고 해결 될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 깊고 깊은 뿌리를 보지 못하고 단순히 셈하듯이 들여다본다면 사람들을 혹하는 사주쟁이와 똑 같다.
“비인(非人)이면 부전(不傳)입네” 하며 도제식으로 전수 되던 명리가 정보화시대를 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마치 무슨 밀교의 비법처럼 이어오던 명리가 세상이 바뀌면서 누구나 맘만 먹으면 배울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인터넷과 출판은 명리의 독학을 가능하게 했다. 스승에게 배우는 것과 독학을 하는 것의 수준 차가 얼마나 되는 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학습자의 노력과 능력에 달린 일일 것이다.
이런 시대 흐름을 나타내는 예가 요새 보인다.
그 중 하나가 최근 명리를 인문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는 점이다. 일반인이 아닌 소위 ‘공부 좀 했다’는 인문학자나 전문가들이 나서니 아무래도 나 같이 천학비재한 사람들은 학문적 권위에 약한지라 동조하기 쉽다.
특히 내가 존경하는 고전평론가 ‘고미숙’ 이나 유명한 대중음악평론가인 ‘강헌’ 같은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잘은 모르지만 꽤 그럴듯한 논리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명리임에도 그동안 내가 들었던 명리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 - 점, 미신, 잡술, 돗자리, “굿을 안 하면 큰일 난다.” 궁합, 무당 등등- 에 대한 학습된 적대감(명리學이 맞다면 편견이겠다)은 늘 한 쪽 머리를 누른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은 모순과 갈등은 비용의 낭비를 초래한다. 쓸데없이 기웃거리다 쟁여 놓은 책만 상당하다.
영원히 초짜를 벗어나긴 힘들 것 같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삶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주에 대한 사람들의 왜곡된 시각 두 가지.
첫 번째 지나친 기대가 가진 오해. 마치 내 미래를 예측해줄 것 같은 기대에 부풀어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사업을 한다면 성공하겠는가? 언제 내 짝을 만날 것 인가? 같은 것인데 사주를 점복술과 혼동하고 있는 경우다.
두 번째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우다. 현대 과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이성을 견지한 사람들로 돋보기 낀 할아버지가 멍석 깔고 앉아 보는 수준으로 생각하거나 아예 무속 신앙의 한 부류로 간주해 버리며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주에 대한 관심에도 두 가지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첫 번째, 사주를 동양 사상의 총화로 생각하고 현대의 물리학과 비교하며 동양은 이미 먼 옛날 자연의 이치를 통달한 것처럼 신봉하며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이 가져다 준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메말라가는 우리네 삶을 보노라면 이러한 복고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얼굴일 뿐 문명에 우승열패란 없다.
두 번째, 인생사의 모든 일들을 운명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사주를 인생의 등불로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 보다 주어진 운명에 따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현재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며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길 바란다. 이리저리 우왕좌왕 갈지자를 그리며 운명의 꼬리를 쫓아다니는 방랑자들에게 사주는 약발이 떨어지면 투여하는 진통제일 뿐, 삶의 진지한 성찰은 희미하다.
내가 처음 사주를 접한 것은 인문학 책을 보다 동양의 음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터다. 음양이 오행이 되고 오행으로 사주를 보니 당연한 일이다. 많은 책들이 음양에 대해 논하면서 과학에 빗댄다. 당연한 일이다. 음양 자체의 두루뭉술한 이야기보다는 이미 원칙으로 자리 잡은 과학을 끌어 들여 검증받는 것이 독자들의 관심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 겨울이 오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아는 자명한 사실임에도 굳이 어려운 이야기로 설명하는 음양오행은 어려운 한자까지 들먹이며 고상한 척 한다. 쉬운 이야기도 이론화하면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로 변한다.
명리의 주장은 이렇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내가 태어난 시점의 환경의 결과물이다. 고로 내가 태어난 지점의 환경을 살펴보면 나라는 존재의 특성을 알게 된다. 나의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한다. 당연히 내가 잘하는 분야로 뛰어 들면 성공할 확률은 높을 것이다. 정확한 자기 분석을 통한 최적의 배팅으로 최선의 결과를 끌어 오는 것이 바로 사주의 목적인 것이다. 결국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컨설팅을 해주는 것이 사주다.
간단한 것을 숨기면 복잡해 보이고 숨기면 신비로워 보이는 것이다. 사주명리학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오랜 기간 동안의 관찰로 축적된 데이터를 경험적으로 적용한 인문학적 통계의 종합적인 분석이론이다. 그런데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가르치면서 특정 계층의 전문화된 지식으로 폐쇄적인 울타리를 두르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사주를 늘 옆에 놔두며 생활 속에서 다루었다. 많이 배운 사람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이다.
사주의 현대적 고찰.
사주는 농경사회의 산물이다. 농사의 성패를 쥐고 있는 자연환경을 알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며 관찰한 끝에 나온 것이 천문학이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에게까지 적용한 것이 사주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신분이 정해진 계급사회에서 개인의 사주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며 농사를 짓다 동네 뒷산에 묻히는 민초들의 단순한 삶에 개별적으로 미치는 운명의 흐름은 지극히 완만한 곡선을 그렸을 것이다.
신분에 꽁꽁 묶인 개인이 어떤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 났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어찌 어찌해서 세종이란 뛰어난 환경을 만난 조선의 천재과학자 장영실처럼 자기 운명을 개척한 이는 극소수의 특별한 변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다르다. 능력에 따라 내 운명이 얼마든지 바뀐다. 역설적으로 사주가 과거보다 더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쓰임새가 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과학적인 것, 미신으로 취급하며 심심풀이 땅콩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강호 도사들의 전유물로 끝내지 말고 학문 영역에서 정식으로 다루고 연구해야 한다.
과거처럼 단순하지 않고 점점 세분화되고 복잡화되는 현대야말로 길을 잃기 쉬우니 사주로 길잡이를 잡고 시작한다면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
어쩌면 우습기도 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다시 말해 우주와 자연이 내게 심어준 바코드로서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알고 이용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운명론자인 것이다.
운명론은 결코 흘러가는 대로 따라 가며 사는 것이 아니다.
진짜 운명론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그 길에 사주는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되 줄 수 있다.
내가 사주를 들먹이는 이유
약간의 인문학적 성향이 있고 공부를 즐겨하지만 정작 사는 스킬이 따라 주지 않는 자존심 강한 부류가 결국 빠지기 쉬운 길이 명리학이다.
잘나가는 사람들은 사주를 볼 뿐 스스로 공부하지는 않는다. 시간도 없겠지만 비실용적이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것을 별다른 대가도 없이 공부하는 것은 낭비일 것이다. 그래서 사주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고, 인생이 별 볼일 없고, 공부머리는 좀 있는 다소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한다.
현대 교육을 받았음에도 외부의 편견과 내부의 아집으로 천대 받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란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사주는 고리타분한 옛날의 공부도, 혹세무민하는 기분 나쁜 잡술도 아니고 연인들의 궁합이나 고시 합격 여부를 찍어주는 서민 애완 해결사도 아니고 정치인이나 재벌의 개인 호사도 아니다.
사주로 밥 먹고 사는 프로가 아니더라도 생의 나침판으로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내 삶의 구조를 파헤치고 방향을 모색하는 인문학의 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눈이 부시다는 말이 진부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최첨단 과학 문명 시대에 정작 문명의 수혜자인 인간은 소외 되어 불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안락한 생활의 뒤편에는 잠 못 이루는 날들의 연속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위성들이 내일 모레의 날씨를 예보하지만 그 어떤 기술도 개인의 미래를 가르쳐 주진 않는다.
그 어떤 기술도 해결해주지 않는 개인의 불안을 가장 미천한 고대의 점복술에 기대어 해결하고자 하는 이 아이러니한 세상에 명리는 그 신비로운 속살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어떤 인문학보다 인문적인 명리학은 불과 여덟 자 글자로 무수한 조합을 구성하며 인간관계를 그린다.
그 알쏭달쏭한 매력에 빠져 쳐다보지만 결과 역시 조합 만큼이라 애매하다. 내게만 해당되는 듯 깜짝 놀라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장난에서 우주 변화의 원리를 말하는 고차원의 이론까지 사주가 가진 스펙트럼은 역사와 편견의 길이만큼이나 넓다.
그래서 오늘도 쳐다보지만 아직도 확신은 없다. 알면 좋고 몰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투자한 시간만큼의 결과는 거두길 바라지만 장담은 못한다. 비인부전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