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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보고 책을 살 수 있고, 사도 후회하지 않을 확신이 드는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다.
선생의 책이 신간으로 나온 것을 안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 오랜만에 좋은 글을 하나 읽나 싶어 내심 반가웠다.
선생의 글은 차가운 폭포수가 내리 붓는 절벽 밑에서 정좌하고 읽어야 될 글인데 건방지게 소파에 누워 읽었다. 그리고 한 번 읽고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책장에 꽂지 못하고 놔두었다. 언제라도 다시 볼 수 있도록.
처음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만났을 때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었다. 선생이 비록 감옥에 가기 전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교편을 잡고 있었긴 했지만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 금방 대학교에 복직하는 걸 보고 저 분이 무엇을 가르칠까? 명색이 대학교수직 인데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을 저렇게 쉽게 임용할 수 있는가? 내심 의아 했다. 통혁당사건의 무기수라는 배경으로 사회적 배려를 받지 않았나 생각도 했다.
그 의문이 이 책을 보는 순간 완전히 풀렸다. 선생의 사상적 범위와 사고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그건 단순히 학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생의 글에는 틀에 박힌 딱딱한 이론이 아닌 살아있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고, 그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이 깊게 배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론이 결국 인간을 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던 그다. 그 간단하고도 중요한 점을 늘 간과했기에, 수많은 책속의 글은 그냥 인쇄된 활자로 남았을 뿐 난 단 한 글자와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선생은 감옥을 대학이라 칭했다. 말 그대로 크게 배웠다는 것이다. 감옥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식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는 곳이라 했다. 인간 그 자체로만 판단되는 감옥의 정직함은 그로 하여금 인간을 알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고 했다.
무려 20년 동안 만났던 수많은 죄수들의 삶은 오롯이 그의 공부가 되었고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도 날카로운 이해와 성찰은 그들이 준 선물이었다. 무기수의 삶은 곧 구도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구도의 목적을 개인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관계로 보는 그의 탁월한 분석은 깨달음을 얻은 자의 성찰과 통찰의 날카로움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한 사람의 수준은 그의 인간관계의 수준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말이 너무나 아프게 내 가슴을 흔들었고, 오직 책을 통한 자아실현을 지향했던 무지와 어리석음에 머릿속까지 아렸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의 성과는 지금 타인과의 관계가 샅샅이 증명하고 있다. 단순하고 천박한 생각으로 허술하게 엮은 나의 관계에는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연대와 실천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창고의 풀풀 날리는 먼지였다.
인문학은 사람을 위한 학문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빠진 인문학은 뿌리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자아의 성찰을 이야기한다.
공맹, 노장 등 선생이 좋아하는 동양사상을 중심으로 세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수형생활의 경험으로 깨달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말한다.
물론, 세상에 대한 인식도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임을 강조한다.
노자의 한 구절, 공자의 한 구절을 곱씹으며 우리의 삶에 연결시키는 선생의 탁월한 식견은 우리가 왜 책을 봐야 되는가, 무엇을 읽어야 되는가, 어떻게 읽어야 되는 가를 똑똑히 가르쳐 준다.
우리가 그토록 본받으려 애쓰고 신봉하는 서양의 어렵고 고상한 이론보다 그의 쉽고도 간단한 글이 더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어둡고 불행한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사의 수레바퀴에 찢기는 삶을 체험하며 공유한 아픔을 쓰다듬으며 들여다보고 생각하며 찾은 길은 그대로 우리의 철학이 된다.
외세와 반민주에 의해 짓밟힌 우리의 삶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따스함으로 꿋꿋하게 버티며 헤쳐 나온 그의 글에는 멀찌감치 떨어져 재잘대는 어떠한 이론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하면서도 또박또박 쓴 글에는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사상에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철학이 우뚝 솟아오른다.
그에게는 공자가, 맹자가, 노자가 보이고 장자도, 한비자도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공자도 노자도 그 누구도 아니다. 그는 단지 사람을 사랑하는 이일뿐이다. 그것도 광풍에 휘둘리는 여리디 여린 풀잎 같은 이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이다. 어쩌면 그에게 감옥은 광야나 보리수 아래였으리라. 사랑과 관심으로 맺어진 사람의 연대! 그것이 감옥에서 깨달은 선생의 진리였다.
인간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노학자의 가슴시리도록 진한 글에서 난 내가 가야할 길을 보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생각한다. 그는 나의 선생이다. 내 삶의 스승이다. 난 그의 말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