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13년간 나와 함께한 친구와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그동안 조마조마 했었는데 결국 이별의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나의 애마 누비라2의 숨이 멎을려고 한다.

요새 힘들어 하더니 결국 변속기가 맛이 갔다.

매매가 100만원이 될까 말까한 고물차에 수십만원의 비용을 들여 수리를 한다는 것은 고령의 말기암환자를 수술하다 인생을 정리할 시간마저 날려 버리는 것과 같지.

 

내 인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이 친구의 연혁을 훑어 보자.

이 차는 아버지 차다.  퇴직하신 후 어영구영 내 차가 되어 버렸다.

당시만 해도 때깔이 자르르한 새차였고, 노고단을 힘차게 올라가는 박력있는 광고를 전성기의 백지연이 했기에 시작은 나름 괜찮았지만 광고와는 반대로 무겁고 힘도 없고 연비도 안좋은데다 대우를 말아먹은 김우중 때문에 순식간에 시들어 버린 비운의 차다.

 

없는 살림에 새차는 꿈도 못꾸고 적당한 중고차를 사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문득, 이 차와 함께한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 차는 여러가지로 내 인생과 겹친다.

 

2000년 1월에 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이 차 역시 2000년 1월 등록차량이다.

반짝거리는 이놈을 타고 소개팅도 나가고 선도 보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러도 다녔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때다.

첫 만남의 자리에 시간이 늦어 허둥대는 나를 신속하게 모시고 간 놈도 이놈이고

첫 야외 데이트에 놀이동산의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놈도 이놈이고

추운 날 자동차극장에 처음 갔을 때 시동을 켜면 다른 사람들의 영화감상을 방해할까봐 덜덜 떨며 재미없는 영화를 봤을 때도 이놈과 있었고, 

추운 겨울 차창밖으로 이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조그만 케익에 촛불을 꽂고 생일파티를 했을때도 이놈과 있었고,

아내를 바래다 주며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첫 키스를 할때도 이놈이 보고 있었고.

만삭인 아내와 같이 간 첫 여름휴가지에서 미처 숙소를 잡지 못하고 차안에서 하룻밤을 보냈을때도 이놈과 함께였다.

 

한밤중에 아이가 아파 응급실에 뛰어갈때도 같이 뛴 놈이 이놈이고,

첫 장거리 가족여행지인 거제도 1박2일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일등공신도 이놈이요

부모님과 함께 리조트에서 보낸 효도관광도 이놈과 함께였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 난 내 나이만 생각했는데 이 놈도 나와 똑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이놈이 그동안 내 발로 살아온 역정은 잊은채 남들이 똥차라고 놀리면 같이 놀려먹었다.

"에이 이놈의 똥차! 빨리 버리고 새차를 사야지..."

새차를 살 수 없는 무능력에 한탄하며 원망했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하 주차장에 말없이 무겁게 서있는 너의 상처뿐인 모습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짠한 마음이 든다.

 

고생했다. 나의 애마야.....비록 기계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니가 내게 보여준 충성심을 절대 잊지 않으마

깨끗하게 폐차를 하자꾸나

돈 몇푼 더 받자고 너를 욕보이지 않으마

 

내 사회생활의 첫발을 너와 함께 시작했고

행복할 때도 힘들때도 항상 같이 있었고

더운날도 추운날도 비오는 날도 말 없이 뛰어 다닌 너.

 

너는 내 인생의 좋은 친구였다.

잘가거라. 그동안 고생많았다.

이제 편하게 푹 쉬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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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3-09-0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이렇게 묵묵히 곁을 지켜온 물건들이 사람보다 정이 더 갈때가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