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최초로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대부분 초등학교 입학 후 일기일 것이다.
저학년 땐 그림일기를 그리는데
‘엄마랑 수박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친구랑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가
계속 이어지는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삐뚤빼뚤 글자 몇 개를 써 놓으면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라고 새겨진 동그란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때는 방학 때 일기 쓰기가 기본 숙제였다.
방학 내내 미루다 개학을 코앞에 두고서야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느라 고생했던 추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내용은 그럭저럭 기억을 되살려 만들어 내는데
지나간 날씨를 몰라 난감해 해다 아버지가 보시고 버린
신문의 일기예보를 뒤적이며 나의 재치에
스스로 감탄하며 베낀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또 그때는 글짓기 시간이 꽤 있었다.
국어 시간에 동화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자주 받았던 것 같다.
그놈의 방학숙제에도 독후감은 단골 메뉴였다.
글짓기 대회도 자주 있었다. 주제는 주로 ‘김일성과 북한 타도’와 같은
이상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고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었던
엄혹한 독재의 시대였음에도 공교육이 글쓰기를 생각보다 중시한 걸 보면
현재와 비교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초등학교가 끝이다.
중고등학교 과정엔 글짓기가 없다. 글이란 걸 써본 기억이 거의 없다.
대학교에서도 리포트 제출 외 별도 글쓰기를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사회에 나와 보고서를 작성하고서야 나의 글솜씨를 새삼 자각한다.
시작할 땐 누구나 칭찬할 수밖에 없는 멋진 보고서를 기대하지만
결과는 늘 그저 그런 수준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란 게 글로 먹고사는 작가나 관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웬걸 직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글솜씨였다.
내 정보와 생각을 공식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은 결국 글밖에 없었다.
그제야 아차! 하지만 글솜씨란 게 하루아침에 느는 게 아니다 보니
늘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왜 난 다시 글을 쓰는가?
일기 숙제도, 리포트와 보고서를 써야 할 일도 없는데
왜 난 지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가?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을 꽤 상회하는 수준의 독서를 평생 했음에도
책을 읽으면 바뀐다는 인생이 아직도 그대로인 날 보며
독서의 부질없음에 늘 실망하곤 했다.
이제야 알겠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한 몸이라는 것을
읽기만 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읽는 건 그냥 시작일 뿐이라는 걸
읽는 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행위란 걸
읽는다는 건 그저 정보를 아는 것까지의 과정이란 걸 알았다.
글쓰기를 해야 내 생각이 밖으로 나오고 그래서야 변화가 시작된다는 걸
글을 쓰고서야 내가 읽은 게 이해한 것이 아니란 걸
글을 써야 읽은 게 소화가 된다는 걸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았다.
오만한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것에 대해 쓸라치면 쓸 말이 없었다.
내가 그것에 대해 쓰지 못한다는 건 결코 아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읽기만 하는 건 내 운명에서 나를 소외시키는 것이며
글쓰기가 더해져야 책과 나는 온전한 하나로 변화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쓰기 위해 읽어야겠다.
쓰기 위해 생각해야겠다.
이제 나는 정정한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독서’가 아니라고.
‘독서와 글쓰기’라고.
‘독서와 글쓰기’는 총과 총알이자 활과 화살이다.
따로는 존재의 의미가 미약하다.
고미숙 작가님의 말씀을 빌자면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읽기는 그저 정보로 환원된다.
그 정보는 아무리 원대하고 심오해도 존재의 심연에
가 닿을 수 없다.”
반성한다. 지금까지 난 그저 지적 허영을 즐겼을 뿐이다.
지금까지 내 독서는 읽는 척, 아는 척, 생각한 척,
내 삶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부표처럼 떠다니며 간질일 뿐이었다.
이제라도 내 존재의 심연에 닿을 수 있도록 글을 써야겠다.
제대로 된 독서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