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로 동요를 연습하다 우연히 눈에 띈 이 노래. 아주 오래전 동요다.

아마도 이 동요의 가락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 나온다면

상당히 연세가 높으신 분들임이 분명하고

요새 젊은 세대는 모를 확률이 높다.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셋이 이마를 마주대로 걸어간다.

여기서 파란 우산은 상류층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

옛날엔 무슨 물건이든지 컬러는 귀했다. 무난하고 평균적이기에 원가가

낮았을 검정색에 비해 파란색 우산은 분명 한 푼이라도 더 비싼 우산이었을 것이다.

 

검정 우산은 중류층 아이일 것이다.

 

당연히 찢어진 우산은 가난한 아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찢어진 우산을 가져가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돈이 없으니 찢어졌더라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찢어진 우산마저도 없는 극빈 가정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출연하지 않으니 제외한다.

 

중요한 것은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의 세 아이가 이마를 마주 대고 등교를 한다는 것이다.

잘사는 집 아이나 못사는 집 아이나 빈부와 계급에 상관없이 서로 나란히

걸어가며 등교를 같이 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이 이렇다면 어른들도 빈부격차를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부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사회

동요 속 아이들의 세상은 훌륭한 곳이다.

 

지금은 파란 우산은 벤츠를 타고 등교하고

검정 우산은 그랜저를 타고 등교하고

찢어진 우산은 걸어서 등교하고

우산조차 없는 아이는 등교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다.

똑같이 우산이 없지만 아예 비를 맞을 틈이 없어 우산을 스스로 들고 다닐

필요도 없는 진짜 부잣집 아이는 열외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빈부격차는 필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그대로 계급의 차이로 나뉘고

부의 소유 정도가 그대로 만물의 척도가 되어 버리는 세상

돈에 모든 것이 소외되어 버리는 일당독재의 세상이어서는 안된다.

 

모두 파란 우산을 갖고 싶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찢어진 우산이라도 줄이려고 애를 쓰지만 녹록치 않다.

 

그래서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이 나란히 가는 모습은

지나간 동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런 세상이 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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