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괴 2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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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로 시작하여 "왜?" 로 끝나버린 소설.

   처음에는 "왜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닌 걸까?" 라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고

   그것이 후로 지나갈수록

   도대체 이 모든 현상은 왜 일어나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비록 이런 장르(?)의 미스터리물은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비록 '결괴' 가 그 장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결괴의 특이점은 아무래도 범인일법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사건의 범인은 누구?' 라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의 소설은 아님에도 불구.

   사건이 있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독자의 속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인지라

   '범인이 누구' 에만 맞추어진 시각으로 내용을 살피면

   정말이지 등장인물 모두가 범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3. 그렇다면 왜 모두가 범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까?

   이쯤부터는 나의 독자적인 해석(혹은 오해) 이 들어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대놓고 폭력에 길들여진 상황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아예 폭력의 그림자조차 목격하지 못 한 사람보다는 폭력에 가까운-

   한 마디로 중간의 어디 쯤 위치에 있는 나로서는 

   폭력이 발생될 수 있는 상황은 언제, 어디서나 이다.

   부모가 아이를 때리고,

   남편이 아내를, 혹은 아내가 남편을, 

   남자가 혹은 여자가 자신의 애인을 구타하는 그 상황의 이유는

 

   "알고 보니 그 아이가 내 친자식이 아니라서"

   "알고 보니 바람을 피우고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 묵혀왔던 마음 속의 증오가 한 번에 터져서

   그런 식으로 분출될 수 밖에 없던 게 아니라

   그냥 그 순간에 충실한 반응일 수  있다는 거다.

   그 사람의 내면에 물론 상대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그것이 100%는 될 수 없고

   상사에 대한 짜증 몇 프로, 애인에 대한 실망 몇 프로

   경제사정에 대한 스트레스 및 가족에 대한 불만 등등이

   버무려지고 버무려진 와중에 그냥 불씨 하나가 던져져서 폭력이 시작된 거다.

   그렇기에 결괴에 등장하는 모두가 범인으로 보였던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그렇기에 폭발할 거리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었던지라.

 

4. 다만 무섭다 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폭력이 너무나도 쉽게 전염된다는 것이다.

   전염될 뿐 아니라 둔감해지기까지 한다.

   결괴 1권보다 2권이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던 데는 거기에 있다.

   사건으로 인해 무너져버리는 한 일가족의 모습이. 개개인의 모습이

   단순히 소중한 이를 잃어 상실감으로 무너져버린 것이 아닌

   폭력이 훑고 지나간 상흔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러다 문득 지금 여긴 어느 정도까지 떨어져 있나 를 생각하게 되었다.

 

5. 이제 악플로 자살까지 가는 것도 옛말이 된 것 같고

   인터넷에 악플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인식되어버린 것 같다.

   도리어 악의적인 장난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또 하나의 폭력이 묵인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성장환경이 다르다' 고 하여 손가락질 하는 것이 묵인되었던 과거의 언젠가처럼

   익명의 가면을 둘러쓰고 사람을 난도질 하는 것이 그냥 묵인되어버린 것이다.

   방송매체가 점점 폭력적이고 선정적이 되어가는 것이 무서운 것은

   이렇게 둔감해져 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욕설을 퍼붓고 말로라도 희롱하면 안 되는 것이 상식이거늘

   어느 틈엔가 "뭘 이정도로~" 라고 반응하게 된 것 같아서.

   그러다 필시 언젠가는 '화가 나서 사람을 반불구로 만들었다' 는 기사에도

   '뭘 이정도로 안 죽었음 됐지' 라고 반응들을 할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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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라는 말도 없이
김동영 지음 / 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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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론부터 말하자면 -

   2개 반 ~ 3개 짜리 평작에 지나지 않음.

   그 이상의 감흥도, 이상의 설렘도 없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2. 이리도 독하게 말을 하는 이유는

   언뜻언뜻 지나쳐간 '외로움' 에 대한 작가의 감성과

   그 감성이 살아있는 듯한 몇몇 문장이 아까워서랄까.

   이는 나라는 사람이 여러 개의 주제와 여러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다소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리 생각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 속의 화자를 철저하게 고립되고 늙어버린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면

   박범신 씨의 '은교' 나 혹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만큼의 

   무력한 늙은이의 자화상이 나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자가 무력하고 또 무력할수록

   그가 느끼는 외로움과 긴 시간에 대한 무력감은 증가될테고

   필시 책을 보는 누군가에게까지 전해졌을 테다.

   이토록 긴 시간을 견뎌야만 하는 그 고통이 어떠한지를.

   물론 이전에 문장과 묘사라는 걸림돌이 존재하긴 할테지만.

 

3. 이쯤에서 두 번째 결론을 내려보자면-

   포장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분명 화자는 '긴 시간에 지친' '곁에 친구 하나도 없는'

   죽도록 외롭고 고독하며 무기력하기까지 한 노인인데

   사실상 그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언덕을 올라가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체력을 지니고 있고 

   화자와 나이 차이가 서른 살 이상씩 나는 여자들과 무리 없을 정도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의 감성(어쩌면 외모일지도 모름)을 지니고 있다.

   '잘 지내라는 말도 없이' 라는 소설이 말하려는 듯한 '외로움과 고독' 이란 게

   꽤 그럴싸한 조건을 가진 노년의 화자가 말하기에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 화자가 외롭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 화자만큼의 시간을 살아보지 않은 독자들이 보기에.

   혹은 그 화자를 만들어낸 작가 스스로만큼의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

   과연 저리도 그럴싸해 보이는 듯한 조건의 화자가 말하는 외로움이라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4. 만약 내가 나이듦을 주제로 무언가를 그리게 된다면-

   난 일단 '소녀' 를 배제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 또한 배제할 것이다.

   남은 것은 그저 나이들었음에도 지속해야만 하는 노동과 아직도 어깨에, 등에

   매달려 있는 가족이란 존재를 담을 것 같다. 지금 생각으로는 말이지만.

 

5. 결국 어떤 화자를 창조해내도

   10년 이상의 중견작가(무형의 것을 창조해내는 데 다소 이력이 난 사람들)가

   아닌 이상은 약간의 자기반영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일인 듯 싶다.

   이석원 씨의 '실내인간' 을 읽었을 때처럼

   이 소설 역시 생선 김동영 의 모습을 제하면 내면 깊숙히까지 침투하지는 못 하는 듯 싶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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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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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방 첫번째 리뷰

http://blog.naver.com/cheshireee/90144999453

 

 

처음과 달리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그들을 어떻게 살게 하였나.

 

누차 생각해왔듯 내가 부모에게서 얻은 것 중

가장 큰 백분율을 차지하는 것들이 체념과 포기, 원망,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는 성향- 등이라면

과연 난 그들을 어떻게 살게 하였나.

 

굳이 '외딴 방' 때문이 아니라도 문득문득 출퇴근 버스 안에서 들곤 하는 생각이다.

 

일과 집, 그저 일과 집으로 점철된 생활을

고의는 아니었다 해도 여지껏 그들에게 강요해왔구나

내 꿈을 쫓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들의 꿈(어쩌면 집이었을, 또 어쩌면 자녀의 결혼이었을)을

망가뜨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 한번쯤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풀어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겨우 외면이 가능하게 된 지금 보다 더 무덤덤해져

상황에 관여하면서도 그것이 날 해치지 않게끔 내가 강해졌을 때

아니면 아직도 문득문득 옛 감정들이 치밀어 올라 눈물이 날 때 그것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지나간 날들을 되짚어 가며

하나의 거름이나 외면도 없이 써내려가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도.

한 번쯤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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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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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다. 혹은 사랑스럽다는 감상이 10~20 % 쯤.

 

비일상적이고 어두워 묵직하기 짝이 없는 주제가 아니라 좋다는 생각만큼이나

 

어째선지 익숙치 않은 감정

혹은 잊은 지 오래 된 감정들을 리플레이 시켜야 할 때 느껴지는 미미한 두통이

읽는 내내 자리하고 있었다.

 

'그저 끌리면 산다' 는 스스로의 철학을 고수하다

두 자리 수에 달할 만큼의 책을 실패(?) 하고 난 뒤

 

책에 대한 나의 구매 성향은 점차 명사, MD의 평가는 물론. 독자리뷰도 챙겨볼 뿐 아니라

그 독자가 구매한 다른 도서까지 알아보는 데 이르렀다.

물론 귀찮은 걸 심히 싫어하는 또다른 성향 탓에

몇몇 사람의 리뷰와 몇몇 개의 구매도서를 확인할 뿐이지만.

 

근래 산 책 중 가장 결론이 나지 않는 책이 '소년을 위로해줘' 였다.

 

무겁고, 심각하지 않아서 좋다는 의견이 많은 것 만큼이나

더없이 가볍기만 해서 싫다는 의견 또한 많았다.

 

나의 취향은 굳이 표현하자면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고 생각한다.

 

십수년이 지나도 서로를 잊지 못 하는 애달픈 사랑이야기는 읽을 수 있으나

서로를 끔찍히 사랑하다 못 해 그것이 변질되어 주변의 모든 환경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광적인 사랑 이야기는 읽을 수 없다. 아니 읽을 수는 있지만 힘들다.

 

스펙터클한 것보다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선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일상적이고 현실적일 것에 얽매이다

심각한 문제들이 너무 심각하지 않게 그려져 버린 것들은 싫어한다.

 

최대한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을 것.

아마도 일상과 현실 에 대한 나 나름의 표현원칙을 들어보자면 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슬픔 또한 자제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슬픔이 느껴지는 것을 애써 자제하여 표현하려 들지 않을 것이란 의미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을 위로해줘' 는 꽤 훌륭한 소년의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장물' 이 아니라 '소년의 이야기' 라는 것이다.

수많은 아픔과 고난을 겪고 이 소년은 마침내 이런 어른이 되었습니다- 가 아닌

이런 소년이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고, 이렇게 살아왔으며, 지금은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에 가까운 이야기.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서 좋다' 와 '가벼워서 싫다' 는 감상이 공존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작가 은희경씨가 어떤 느낌과 어떤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 '소년을 위로해줘' 는 '위로가 필요했던 어떤 한 소년의 이야기' 일 뿐이다.

 

한 명의 소년의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에 

그 한 명의 소년의 것이 아닌

청소년'들' 과 그 세대의 이야기와 그에 따른 통찰력은 불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하고

어설프게나마 작가의 의도를 추측하여 본다.

 

 

이쯤 되어 간략하게 평을 요약하여 보자면

 

1. '특수 케이스에 놓인 청소년을 그린 성장물' 이 아닌

   '그저 그런 한 명의 소년이 통과한 어떤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2. 가벼움과 무거움이 적절히 공존하고 있는 만큼

   어렵지 않게 진행되는 내용 전개와 꽤 어렵게 접근해야 하는 감성이 공존하고 있다.

 

3. 청소년에 대한 관찰과 그들의 내면을 알고 싶은 분들은

   소설이 아닌 다른 분야의 서적을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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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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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상실의 시대' 로 하루키 열풍이 불었을 때

 

차라리 난 무라카미 류 편을 들었던 한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상실의 시대' 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왜 그의 글이 그토록 와닿지 않았는가 물어보면 대답은 하나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물론 소설이 무엇을 어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따져보면 난해한 소설도 꽤 많고

어떤 경우 명분과 이유를 만든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경우도 많으니까.

(이를테면 연쇄살인범을 등장시켜 놓고 그가 살인범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애정결핍 따위를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등-)

 

그러나 하루키의 글을 볼 때 느껴지는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라는 느낌은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드는 감정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상황으로 빗대어 표현해보자면

 

'실연을 당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빗고

세수조차 하지 않은 채 도넛가게에 가서 한참동안이나 남자 점원을 바라보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도넛을 사서 돌아와 먹지 않았다' 는 느낌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왜 갑자기 일어나 도넛가게에 나갔는지

 

남자 점원을 왜 그토록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는지

 

달콤함으로나마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다른 도넛이 아닌

왜 하필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도넛인지

 

그리고 왜 기껏 사와서 먹지 않았는지

 

'실연을 당해 마음이 아프다' 는 것까지는 설명해주지만

 

그 실연으로 인해 생겨나는 듯해 보이는

상황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는 듯 해서

 

하루키의 글을 볼 때면 늘 흐릿하고 개운하지 못 하다.

 

아마도 거기에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도 알고 있으리라' 는 생각

(또는 착각이나 오해)이 깔려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해보는 바이지만 그저 그 사람의 성향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성향과 난 여전히 접점이 없는 상태라고-

 

 

p.s. 이번 책의 경우 대관절 유즈의 거짓말과 그 악령은 무슨 사건으로 인해 생겼는지가 의문이다.

      '실제 사건은 다른 곳에 있는데 그것은 저만치 떨어뜨려두고 사건에 대해 토론을 하는 듯한 분

       위기' 도 어찌 보면 하루키스럽다 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지점이다. 취향이 대중적인 건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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