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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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늙어가는 누군가의 일상의 기록이 아닌

안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는 사람이 안간힘을 쓰는 과정으로 본다면

모든 문장과 순간이 달리 보인다.

그리고 그 발버둥은 무척이나 안쓰럽고 처연해서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거리낌없이 죽음을 얘기하는 사람만큼이나

거리낌없이 삶을 얘기하는 사람 역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부류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내면의 전쟁을 알지 못 하는 이상

외부에 드러난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삶' 과 '죽음' 을 재단하며

그래도 살아야 한다. 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해서 누군가 내 앞에서 자살을 도모한다면 말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 다행인 일이었다.


한 개인의 고민과 우울과 전쟁에 대해 쉽게 '버팀' 과 '삶' 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허나 내 앞에서 누군가 자살을 이야기한다면 혹은 행하려 한다면

과거의 결심처럼 난 말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전에 '왜 굳이 나한테 알리려 드는 걸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라는 생각에

오히려 분노가 일 수도 있겠지.


사람 누구나 저마다의 지옥이 있고

그 지옥은 모두 각자 알아서 버텨낼 수 밖에 없다 라고 여전히 생각하긴 하지만 

정말 도움이 간절한 누군가가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문득 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유일한 동반자를 잃어버린 소수자인 주인공의 입장을

예전보다 더 인지하며 읽은 탓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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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어떤 과학자가 괴물을 만들어냈다‘ 는 것 뿐 실제로(?)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지금 심경은 뭔가 처음치고 호되게 당한 느낌이랄까.

애초에 고전 자체를 읽기 힘들어하는 성향인데다
선과 악의 이야기가 아닌 그저 행복하고 싶은 두 존재의 충돌이라니.
게다가 결국 어느 쪽으로도 끝을 내지 못 함에도 먹먹한 이 결말이란 대체...

왜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언급되고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여기저기서 활용되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몇 살에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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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이던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숑이 했던 말이? 왠지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드는 의문. ‘생활‘ 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쓸 수 있게 된걸까. 관찰일까 경험일까 타고난 것일까. 내가 나의 창작물에 갖고 있는 열등감은 ‘현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현실성과 관계없이 박제된 이미지의 연속촬영이란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현실이 없으니 삶이 없고 삶이 없으니 생활도 없고 온기마저 없다.

그래서인지 이런 글을 보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어지는 생활 속 무언가 시작되려는 그 지점만 골라내어 프레임을 덧씌운 듯한 이 시선은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 타고난 걸까 노력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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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검은 피
허연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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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TV 를 보다보면 언제까지 통용될 것인가 싶은 것들이 있다.

송창식과 김광석을 얘기하고, 90년대 아이돌을 이야기하며

흘러간 얘기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공감대가 깔려있는 일련의 정서, 문화코드들.


이전의 감상이야 어땠을지 몰라도 그런 느낌이었다.


담배꽁초가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취객이 나뒹구는 

비오는 골목의 풍경이야 언제든 있을 법하지만

그 골목의 집들이 더이상 슬레이트 지붕이 아닌 것처럼

우울한 정서, 그 풍광 역시 어느새 달라져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무엇보다. 

연탄가스에 질식하며 부르짖는 사랑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책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는 건 아니다. 

그냥 내 인상이 그렇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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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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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째 읽는 것인 줄 모르고 두 번째 읽었다.

   그만큼 내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것일까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이제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정서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과거의 언젠가. 기묘한 열등감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공사장에 가서 벽돌 날라본 적 없다' 등의 일화로 

   소비되는 이른바 '고생해본 적 없다' 는 열등감.

   물론 마음 고생이야 어디에다 대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야 있지만

   물질적, 육체적 고생을 해본 적 있냐 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던 시절.

   그로 인해 온실 속 화초 취급받던 나는 화초라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림 그린다는 자가 어찌 화초가 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이 수시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3. 그래서 부러 처절한 이야기들을 찾아 읽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음의 한 연구' 를 읽었던 것도 

   아마 그 시절의 일일 것이고

   기형도 라는 시인의 이름자를 알게 된 것 역시 그 시절의 일일 것이다. 

   스스로를 치열하게 살아본 적 없는 존재라 여겨

   어떻게든 치열한 빛의 열기라도 느껴보고 싶던 자의 발버둥이었다.


4. 허나 그것만이 정의인가.

   화초라고 무시당하며 구르다 보니 또 화초 나름의 깡다구가 생겼는지

   도리어 반문할 만큼의 여력도 생겼다.

   이 세상 어디 정도가 있단 말인가. 

   어찌 네가 한 고생만 고생이냐 말이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아니 고생을 했거나 말거나.

   그걸 빌미로 사람을 치켜세우고 우습게 볼 자격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5.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16년도였다. 

   그 때의 기록을 보자니 기형도와 불온한 검은 피를 운운한 것을 보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아무런 동요가 없을까.


6. 어쩌면 내가 어떤 시절을 지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해서 더 이상 투쟁과 사투 끝에 남겨진 

   허무의 의식은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7. 위선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다.

   더럽고 추악한 것들은 사회만으로 충분하다.

   이게 잘못된 걸까? 


8. 점점 보지 못 할 책과 이야기들이 많아질 듯한 예감이 든다.

   이게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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