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 박상진 / 왕의서재 

여러 소나무 종류 중에 백송은 이름 그대로 껍질이 하얗다. 흥미롭게도 어릴 때는 청년의 상징인 푸른색이었다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사람의 머리카락이 세듯이 점점 더 하얘진다. 유난히 흰색을 좋아하고 신성시하는 우리 민족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종류인 백송을 귀하게 여겼다. 더욱이 우리 땅에는 자라지도 않고 문화의 중심지라고 생각한 중국 북경지방에 자라는 나무이다 보니 더더욱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백송은 대부분 조선왕조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이 가져와서 심은 것이다.  

조선 순조 9년(1809) 늦가을. 24살 청년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이 동짓달에 인사차 파견하는 동지부사로 북경에 가는 행차에 합류한다. 조선왕조 때 외교사절의 자제들은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이렇게 아버지를 수행할 수 있었다. 북경에 머물면서 그는 쉽게 볼 수 있는 휜 얼룩부늬 껍질을 가진 특별한 소나무, 백송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 백송을 가까이서 어루만지며 자랐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사위되면서 지금의 동의동 정부종합청사 뒤편에 있던 '월성위궁'이란 대저택을 하사받는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곳으로 정원 한 구석에는 숙종 때 심어진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호 동의동 백송으로, 1990년 7월 돌풍에 맥없이 넘어져 버릴 때까지 살아 있었다. 죽고 난 다음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조사해 본 결과 1690넌쯤에 심은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추사의 어린 시절인 18세기 말쯤에는 백송은 100살 가까운 한창 나이로 싱싱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때다. 그는 월성위궁에 있는 동안 열 살 전후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졸지에 대종가의 종손이 된다. 어린 나이에 받은 엄청난 충격을 추사는 백송을 어루만지면서 달랬을 것이다. 이렇게 백송과 깊은 인연을 맺은 추사가 이국땅 북경에서 다시 백송과 만났을 때는 남다른 예술가적 감상으로 어린시절과 고향생각을 일깨웠을 듯하다. 

추사는 북경에서의 두 달 남짓한 생활을 접고 1810년 2월 초 귀국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수집한 수많은 서화와 함께 그가 빠뜨릴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백송을 가져오는 일이었을 터다. 나무 하나를 통째 가져오고 싶었겠지만 옮겨심기가 안되는 나무에, 한 달 넘게 걸리는 귀국길이다 보니,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솔방울 몇 개를 골라 귀국 짐짝 속에 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 않을까. 추사는 3월 중순 어는 날, 예산의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영의정을 지낸 고조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가져온 백송을 여기에 심는다. 

백송은 땅속에서도 까다롭다. 금세 싹을 틔우지 않고 한 해 쉬면서 땅기운이 어떤지 알아본다. 다음해인 1811년, 조선 땅의 속사정을 파악한 '추사의 수입백송'은 바로 땅을 비집고 올라온다. 그러나 묘소 주변이 황토로 된 메마은 땅이라 살아남아 크게 자란 것은 채 몇 그루 되지 않았다. 그나마 세월이 지나면서 묘소 앞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선 자리에, 달랑 한 그루만이 살아남아 천연기념물이 됐다. 

추사 백송의 나이는 200년이며, 키 14.5미터, 가슴높이 둘레 2.8미터, 가지 펼침 동서 13.7미터, 남북 17.3미터로 키만 크고 비쩍 말랐다. 모양새는 손이 귀한 추사 집안이 번성해 삼정승이 나오기를 기원하는 듯, 1980년대까지도 밑둥치부터 셋으로 갈려져 있었으나 그 뒤 나머지 줄기 둘은 죽어버리고 지금은 외줄기가 되어 있다. 아쉬움이라면 죽은 줄기를 잘라낸 부분에다 백송 색깔을 흉내낸답시고, 흰 횟반을 뒤집어씌워 놓아 본래 나무가 가진 단아한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320~323쪽) 

 

지난 주말 예산에 다녀왔다.
초등 동창이 얼굴이나 보자고 초대했는데, 그냥 친구들 얼굴 보고 밥만 먹으러 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작년에 위 책을 읽고 별렀던 추사 고택과 백송을 보고 수덕사에도 다녀왔다. 여기는 추사 백송 사진만 올린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고조할아버지 김흥경 공의 묘소 앞에 직접 심은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 

 

 

 

 

 

  

 

 

추사고택과 수덕사 사진은 따로 올릴게요 ~ 이성자 교수 강연회 시간돼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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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from 엄마는 독서중 2011-04-13 13:31 
    4월 9일, 예산 추사고택을 다녀왔다.우리가 익히 아는 추사에 대해 알아보면...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부친 김노경씨와 모친 기계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제가의 눈에 띄어 학예로 대성할 것을 예언, 수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1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우도 암행어사, 예조참의, 성균과 대사성, 병조참판을 지내다가
  2.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from 엄마는 독서중 2011-04-30 09:05 
    우리가 어느새 저마다 귀밑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갑자가 날아든 초등학교동창회 초대장이 우리를 고향으로 불렀다. 배운 자도 되고 못 배운 자도 되고, 가진 자도 되고 못 가진 자도 되고, 짓밟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는 사이에 속절없이 흘려보낸 세월을 무슨 사나운 꿈처럼이나 여기며 우리는 거기서 퍼뜩 깨어난 듯 고향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쉰을 바라보게 된 나이도 허세 같은 여유를 주어 더 많은 우리를 모이게 했다. (아가 10쪽)이문열의
 
 
하늘바람 2011-04-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스타일은 정말 멋져요 쉽게 따라쟁이도 못하고요.
백송이 참 신기하고 멋지네요

순오기 2011-04-13 13:36   좋아요 0 | URL
시간 여유가 없어서 아쉬웠어요.
백송은 나도 처음 봤어요~

무스탕 2011-04-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동의 월성위궁, 그러니까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이란 월성위궁이 드라마로 말하자면 '동이' 에서 동이 한효주가 연잉군이랑 나가서 살던 사가를 말씀하시는거죠?
추사고택도 많이 궁금합니다요 :)

순오기 2011-04-13 13:37   좋아요 0 | URL
드라마 동이는 안봐서 모르겠고, 어쨋든 동이가 영조의 어머니 숙빈이니까 아들 연잉군과 살았던 집이라면 맞겠지요. 추사고택 사진 올렸으니 보시와요!^^

잘잘라 2011-04-1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신기 신기 @.@
우리나라, 나름 다닌다고 많이 쏘다녔는데 '백송'은 보는건 물론이고 듣느니 처음이예요.
모르고 봤으면 병들거나 죽은 나무인줄 알았을거 같아요. ^ ^;;

순오기 2011-04-13 13:37   좋아요 0 | URL
늙을수록 하애진다니 신기하죠.^^

꿈꾸는섬 2011-04-1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백송 처음 봤어요. 정말 멋진데요.^^
예산 수덕사엔 가보았어요.^^

순오기 2011-04-13 13:39   좋아요 0 | URL
백송이나 청령포의 관음송이나 다 운치 있지요~ ^^
우린 6학년때 수학여행으로 현충사와 수덕사를 가는데,
그해에는 수학여행 버스 사고가 나서 못 갔어요.ㅜㅜ

2011-04-12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4-13 13:39   좋아요 0 | URL
감사~ ^^

소나무집 2011-04-1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 다녀오셨네요.
저도 백송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순오기 2011-04-13 13:39   좋아요 0 | URL
광주에서 예산,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쉽게 가보지 못했어요.
백송은 다들 처음이라 하니, 내가 좋은 일 한 거 같은 기분!^^

마노아 2011-04-1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본문의 내용을 듣고 보니 책에 더 흥미가 돋아요. 추사고택과 수덕사 사진도 기대할게요.^^

순오기 2011-04-13 13:40   좋아요 0 | URL
본문이 워낙 충실해서 제가 보탤 말이 없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