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추사 백송을 찾아서~
한승원의 소설 <추사>를 읽지 못했지만, 4월 9일, 예산 추사고택을 다녀왔다.
우리가 익히 아는 추사에 대해 알아보면...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부친 김노경씨와 모친 기계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제가의 눈에 띄어 학예로 대성할 것을 예언, 수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1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우도 암행어사, 예조참의, 성균과 대사성, 병조참판을 지내다가, 1840년 55세에 당쟁에 몰려 9년간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44년 59세에 당시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국보 제 180호)는 세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추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께서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영조가 하사한 저택으로 53칸이었으나 현재는 49칸 정도 된다고 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와 사랑채, 바로 뒤에 안채와 사당채가 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ㄱ자형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고, 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인 상우가 추사체로 쓴 것을 새겼다고 한다. 돌기둥 옆에 모란이 있었지만 아직 꽃을 피우기엔 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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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에서 본 전경, 사랑채와 안채가 보이고~~~ 저분은 해설사님이다.^^
아래는 사랑채 뒷모습, 굴뚝과 툇마루가 보인다.
조선시대는 사랑채와 안채가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추사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지 않아 친근감을 주었다. 사랑채나 안채 기둥에 추사의 글씨를 하얀 판에 써 놓아서 고택의 운치를 망가뜨리긴 하는데, 추사의 글씨와 깊은 뜻을 헤아려 보는 것은 좋았다.
사랑채에 걸린 세한도
사랑채 바로 뒤에 붙은 안채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충 ㅁ자형 집이다. 마당이 그리 넓지 않아서 전체를 다 담기엔 무리였다.
아래 사진은 뒤에서 본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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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안채 기둥에 붙은 추사의 글씨, 바로 아래에 친절하게 해설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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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라니,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될 말씀이다.
무량수(無量壽)는 '한 없는 수명'이란 뜻으로 불교의 윤회설에 입각하여 쓴 글이다. 부처님의 법신은 삼세 고금을 통하여 항상 존재하여 멸하지 않으므로, 그 수명이 실로 무량하여 한이 없기 때문에 무량수라 하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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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안마당에서 본 하늘~~~~
ㅁ자형이라는 안채~~~ 마당이 그닥 크지 않아 다 담을 수 없다는~~~ 오른쪽 끝 사랑채가 보인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 사당채로 오르는 계단과 협문이 나오고, 화단의 소나무도 백송이다.
사당채 전면에 걸린 현판과 추사 초상화, 인자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사당채 바로 옆의 대나무, 올해는 맹추위와 뒤늦게 내린 눈 때문에 대나무들이 많이 상했다.ㅜㅜ
안채에서 사당채로 들어가는 협문이 있고, 안채 뒤뜰과 사랑채 뒤로 이어지는 협문이 또 있다.
협문을 나와서 올려 본 사당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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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문으로 내려와서 맨 앞의 사랑채부터 ㅁ자형 안채와 그 뒤의 사당채까지 나란히 나란히~
담장 아래 제비꽃과 올망졸망한 꽃망울도 정겹다.
솟을 대문의 장식~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번개불에 콩 볶듯 후다닥~~ㅜㅜ
고택 옆에 추사기념관도 있고 둘러볼 게 많은데... 많이 아쉽다. 천천히 여유있게 돌아보려면 한 번 더 가야 될....
추사 김정희 묘와 주변의 월성위 묘와 화순옹주 정려문, 백송공원 사진은 다음 페이퍼를 기약하고~~~
보너스를 하나 추가하자면~~~~^^
추사고택 안채에 붙은 무량수(無量壽)와 같은 서체를 해남 대흥사에 가도 볼 수 있다. 본래 대흥사 본전에는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그것도 글씨냐고 책망하며 그걸 떼어내고 자신이 쓴 <무량수각> 현판을 걸게 했단다. 그리고 9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시 대흥사에 들러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89쪽)
라고 했다니, 귀양살이 9년의 세월에 겸손함을 배운게 아닐까?
벼와 사람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의 의미가 아닐런지... ^^
그래서 대흥사에 '대웅보전' 현판이 걸리고, 추사가 쓴 '무량수각'은 그 옆 전각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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