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옛집
최범석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마음산책 이벤트에 꽂혀 열심히 질렀는데 미역국 먹었다.ㅜㅜ 어떤 기준으로 당첨자를 선정하는지, 알라딘이나 혹은 마음산책이 직접 선정하는지 모르지만, 이벤트 기간내 책을 많이 산 사람을 당첨자로 선정하겠지? 음, 내 책과 회원들 책까지 제법 질렀는데, 욕심이 앞서면 행운이 빗겨간다는 걸 다시 확인한 셈이다.    

어제 이 책을 읽고 마음이 차분해져서 그런지 크게 낙심되지는 않았다. 사실 사놓기만 하고 못 읽어서 어제부터 마음산책 읽기에 돌입해, 종일 이 책 한 권 읽었다. 저자의 추억여행에 동참하다보면 어느새 내 추억 속을 거닐고 있어, '방금 내가 뭘 읽었지?' 되짚어 읽어도 기분 상하지 않을 부작용이 종종 생긴다.ㅋㅋ  

14개의 꼭지로 나누어진 책은 시인과 작가들의 좋은 글로 시작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시를 음미하고 문장을 곱씹어 보는 일석이조의 글읽기다. 책 뒤에는 인용된 시집과 작품이 정리돼 있어, 독서영역을 확대하는데도 길잡이가 된다. 멋진 표지 사진과 곳곳에 배치된 사진이며 여유있는 편집은 책의 품격을 높였는데, 학소도를 말하는 지인들의 찬사가 8쪽이나 되는건 과유불급.ㅠㅠ  

  
 
마흔이 넘은 싱글남으로 20대에 70여개의 나라를 여행했다는 저자는 확실한 직업과 영, 독, 불어까지 능통한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다. 인왕산 자락에 아버지가 집을 지어 중학교 1학년 독일로 떠날 때까지 살았던 서대문구 홍제동의 옛집에 둥지를 틀고 12년째 살고 있다. 이 책은 왜 20년만의 귀향에 폐가처럼 버려진 옛집에 둥지를 틀게 됐는지, 어떻게 나무와 꽃을 가꾸게 되었고, 자연에서 배우고 깨달은 게 무엇인지 들려주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며, 집에 관한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자라 고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도시인들도 추억의 한 자락에 슬며시 끼어들 자리를 내주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저자의 집은 30평 정도의 1층 슬라브 집으로,100평 정도의 땅이 절반으로 나뉘어 앞뜰에 집 건물이 있고, 옥상과 같은 높이에 뒷뜰이 있는 특이한 구조다. 그래서 텃밭과 유실수를 심어 놓은 뒤뜰에 가려면 현관을 나와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단다. 학이 날아드는 태몽을 꾸었다는 아버지가 붙여 준 이름 학소도(鶴巢島). 학이 둥지를 튼 이 집은 북쪽과 동쪽이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같은 곳이다. 본래 있던 대문이 막혀서 아버지가 아파트 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아파트 담장을 1미터 정도 털어내고 출입구와 주차공간을 얻어냈다고 한다. 저자가 옛집에 사는 걸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2년 뒤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가 손수 쓰고 낙관을 찍은 학소도를 발견했다는 대목에선 가슴이 찡했다. 지금은 거실에 걸려 있고...  

   

마지막 세입자가 떠난 후 고물상에서 문짝과 창틀까지 떼어가 폐가로 방치된 옛집을, 지인들과 페인트를 칠하고 하나씩 고쳐가면서 사람이 살만한 집으로 탈바꿈했다. 무료로 나누어 주는 나무를 얻으려고 부모님과 친구들의 주민번호까지 빌렸다는 이 남자, 그 넓은 세상을 여행했어도 우리네 보통 사람의 성정과 다르지 않아서 오히려 친밀감이 들었다.^^ 그렇게 얻은 나무 키우기는 실패했지만, 책을 읽어가며 나무와 채소, 풀꽃을 가꾸는 지식을 습득해 이젠 전문가 수준이다. 손수 키운 채소를 먹고 정원에서 딴 과실은 술을 담가 지인들과 호사를 누린다니 부럽기 그지없다. 개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집, 비가 오면 알몸으로 비를 맞기도 한다는 저자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듯.^^  나오는 나무와 풀꽃들은 시골에서 자란 내게는 그닥 낯설지 않다는 것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내 고향집 뒷산에 많았던 자귀나무는,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나무라 더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은지 20년이 넘은 우리집도 어떻게 좀 고쳐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계획도 세워보는 즐거움도 누렸다. 큰 돈 들이지 않고 형편이 되는대로 손수 인테리어를 바꿔가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아파트를 재테크 수단으로 생각해 평수 늘려가기에 급급한 사람들에겐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지만, 한 곳에 붙박이로 살며 대를 이어 추억을 쌓아가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집은 재산으로의 가치 뿐 아니라, 가족의 보금자리로 휴식과 재충전의 행복공간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며 집이라는 주거 공간에 대한 개념정리가 다시 되는 기분이다. 2002 월드컵때 차두리 누나를 비롯한 지인과 외국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옥상에서 방방 뛰며 응원했다는 에피소드는, 시댁 형제들과 목포 아버님댁에 모여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응원했던 우리의 추억도 되새기게 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집에 관한 추억이 많은 저자가 회상하는 그 곳에 가보고 싶은 유혹도 나쁘지 않았고, 그 중에 프랑스 파리 뷔셔리 가 37번지의 셰익스피어 서점 2층 작가의 방에서 지냈던 건 굉장히 부러웠다. 셰익스피어 서점은 대단한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20세기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꼽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셰익스피어 서점 이름으로 초판이 나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저자는 대학강의실과 지구촌 여행길,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많은 것들을 옛집이 가르쳐 주었다고 고백한다. 땅을 일구어 씨앗을 심고 가꾸는 일로 농부의 땀방울과 노동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자연을 통해 정직한 사랑을 배웠다고 한다. 채소와 풀꽃, 나무들을 키워내는 흙이 가르쳐준 것들은 세상 어디에서 배운 것보다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옛집 학소도는 과거의 자신과 오늘의 자기를 확인시키고 부모님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지금도 들려준다며 마무리한다.  

인간은 Home으로 돌아오기 위해 여행자가 되고, 궁극적으로 영혼의 고향인 집으로 돌아오는 존재들이다.  

나의 학소도는 어디인가? 내 유년기 추억 속의 옛집은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훗날 우리 삼남매가 돌아올 학소도를 잘 보존하며 살아야겠다는 현실적인 다짐을 해본다. 내가 꿈꾸는 마을도서관은 우리 삼남매의 기념관을 겸한 것이라, 아이들의 낙서조차 버리지 않고 보관중이다. 혹시라도 빚 때문에 집을 넘기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의 학소도는 보존할 수 있겠다. 물론 물리적 공간인 학소도 뿐 아니라 행복한 안식처로서의 학소도를 잃지 않는게 더 중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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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1-01-11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정말 글 잘쓰신다!!!!!!!!!!!
암튼, 마음산책 이벤트 결과 나왔어요????????그렇구나~~~~~~~~.

그런데 언니도 이벤트에 낙방하는 경우가 있다니!!!!!!!.음.....
암튼, 암튼, 색글씨에 밑줄까지 쳐 주셔서 그런지 이 글 너무 좋아요~.>.<
"인간은 Home으로 돌아오기 위해 여행자가 되고, 궁극적으로 영혼의 고향인 집으로 돌아오는 존재들이다."
맞는 말씀!!

순오기 2011-01-11 02:47   좋아요 0 | URL
잉~ 잘 쓴 글은 아니고, 이 책을 참 맛있게 읽어서 리뷰를 잘 쓰고 싶었어요.^^
눈으론 책을 읽고 있는데 머리는 내 추억을 더듬고 있기가 부지기수였어요.ㅋㅋ
부담없이 읽으며 집이라는 안식처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좋아요.

글샘 2011-01-1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누가 저런 집 한 채 물려주면... 잘 가꿀 수 있는데요. ㅎㅎ
솔직히 저는 집 같은 데 신경 안 쓰고 사는 아파트가 좋습니다. ㅋㅋㅋ

저도 마음산책에선 낙방했습니다만, 뭐, 마음산책처럼 좋은 출판사가 우리 옆에 있단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죠. ㅎㅎㅎ

순오기 2011-01-12 20:5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런 집을 아무나 물려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글샘님도 마음산책 신경쓰셨구나, 그럼 우린 낙방동지군요.ㅋㅋ
2010년엔 마음산책을 알게 된 것 자체가 행운이었어요.^^

양철나무꾼 2011-01-11 0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 한 유니크 하시는 분이더라구요.
전 책은 못 읽었구요, 저희 친정 근처여서 얘기만 좀 들었지만 말이죠.

맞아요, 책은 추억과 맞물리면 더 근사해 지기도 하더라구요.
근데, 이 리뷰 좋은 거 맞거든요~~~^^

순오기 2011-01-12 20:57   좋아요 0 | URL
아~ 친정이 그 근처라니, 살짝 학소도에 가보셔도 되겠네요.^^
양철나무꾼님이 좋은 리뷰라고 해주시니~~~ 그렇다고 믿을래요.ㅋㅋ

후애(厚愛) 2011-01-11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이 다섯개네요. 이 책 찜해야겠어요.^^

순오기 2011-01-12 20:58   좋아요 0 | URL
하하~ 저는 별점을 후하게 주는 편이죠.
나는 리뷰 몇 줄 쓰는 것도 어려워하는지라~ 책 쓰신 분들께 아주 후해요.^^

마녀고양이 2011-01-1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너무 이쁘네요, 언니 리뷰도 너무 푸근하구요. 아이, 참 좋당....
저도 마당있는 집에 살고 싶어요, 언니네는 저번에 보니까 마당도 있으시던데.
집을 가꾼다는거, 정원을 가꾼다는거.. 정성과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거 같아요.
언젠가는 해보겠어요.

순오기 2011-01-12 21:01   좋아요 0 | URL
마당 있는 집 좋지요~~~~~~~
우리집은 사방을 모두 남겨서 정원이라 할수도 없는, 정말 손바닥 만해요.ㅠㅠ

단독주택 사렴서 정원가꾸기는 도시인의 로망일지도... ^^

꿈꾸는섬 2011-01-1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글도 정말 예쁘네요.^^
마을도서관을 꿈꾸시는 순오기님, 언젠가 그 꿈을 꼭 이루시겠죠.^^

순오기 2011-01-12 21:01   좋아요 0 | URL
책이 이뻐요~ 사진도 좋고요.
제대로 된 마을도서관을 이루기까지~~~~~ ^^

2011-01-12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1-12 21:03   좋아요 0 | URL
어~ 정말요?
우린 그거 먹어 본지 한 10년은 된 거 같아요.
강원도 철원 형님댁에서 형제들이 모두 모일 때, 남편이 주문했었거든요.
그때 과메기가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였던거 같아요~~~ ^^

같은하늘 2011-01-1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이 참 예뻐요.
저 같은 사람은 줘도 가꾸지 못하겠지만, 마당있는 집에서 살고싶어요.^^
저도 작년에 마음산책 책 몇 권 구입했는데, 왜 이 책을 못봤을까요?
이번에 찜~~~ㅎㅎ

순오기 2011-01-14 22:10   좋아요 0 | URL
마당 있는 집은 다들 좋아하는군요.
마음산책 10권쯤 사들였는데 새해부터 읽기 시작했어요.ㅋㅋ